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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봄비 한 주머니

입력 | 2014-04-16 03:00:00


봄비 한 주머니
―유안진(1941∼ )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 뿐이라서…


새해를 맞은 게 얼마 전 같은데 ‘올해도 4월!’ 벌써 한 해의 3분의 1을 써버렸다. 이럴 수가! 시간을 도둑맞은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어영부영하지 말고 매 순간을 생생히 살아야지. 생(生)이 피처럼 내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돌게 해야지!

4월의 어느 하루, 화자는 헌혈을 한다. 붉은 피가 ‘320밀리리터짜리 봉다리’로 흘러들어간다. 내 몸에서 생명을 나르던 이 피가 다른 이의 몸에 생명을 나르겠지. 건강한 내 몸을 돌던 피, 아픈 누군가의 몸에 ‘구석구석 속속들이’ 돌겠지. 봄비가 바짝 마른 땅을 적시어 새싹을 움틔우듯 내 피가 그의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를! 그러기를!

붉은 피 한 주머니가 ‘봄비 한 주머니’가 되는 첫 연에서 생명과 생명의 순환에 대한 따뜻한 상상력을 감성적으로 펼치던 화자의 자의식이 두 번째 연에서 돌연 ‘아냐 아냐’ 발동돼 시에 톡 쏘는 맛을 더한다. 실은 헌혈이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이었을지 모른단다.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왜 이리 나른하고 답답하고 우울하지? 살맛이 안 나는구나. 상태가 이런데 그 피에 정신 ‘멀쩡한 누군가 오염될라/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시인은 헌혈을 한다. 시를 발표하는 마음은 헌혈하는 마음과 닮은 데가 있다. 대개의 시인은 제 시가 ‘봄비 한 주머니’ 같은 시이기를 바랄 테다.

몇 해 전 대방역 앞을 지나다 헌혈소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헌혈이나 할까 하다가 피도 싱싱하지 않을 내 나이를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우리나라 헌혈 가능 연령은 16세 이상 65세 미만이란다. 내 피도 아직 쓸 만하구나.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