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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리포트]‘美 원톱’ 사이버 질서 균열… 권력이동 ‘클릭’

입력 | 2014-04-15 03:00:00

[한국 인터넷 상용화 20년]<중>거버넌스 지각변동




#장면 1.

“미국이 이라크 정부와 기업의 모든 인터넷 주소를 삭제하지는 않을까?”

11년 전인 2003년. 이라크전쟁을 준비하던 미국을 보며 일부 국가들은 이런 의문을 던졌다. 만일 그대로 실행됐다면 사이버 공간에서 이라크라는 국가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박윤정 한국뉴욕주립대 교수는 이에 대해 “핵폭탄에 버금가는 위력”이라고 말했다.

#장면 2.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

올해 3월 14일 미국 상무부 산하 통신정보관리국(NTIA)은 이렇게 발표했다. 인터넷 주소 관리 권한을 틀어쥔 미국 정부가 마침내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이 발표는 오랫동안 강고하게 유지돼 오던 ‘인터넷 거버넌스’에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특히 올해 10월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전권회의’가 인터넷 거버넌스 논의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 인터넷의 ‘주인’ 미국

인터넷 주소는 ‘www.donga.com’(동아일보 홈페이지)과 같은 ‘도메인’과 숫자로 이뤄진 ‘인터넷규약(IP)주소’로 구성된다. 이를 할당하는 첫 번째 권한을 가진 곳이 ICANN이다.

1998년 출범한 ICANN은 비영리 민간기구지만 만든 곳은 미국 상무부다. ICANN이 할당하는 인터넷 주소의 최종 승인도 NTIA가 맡는다.

미국 정부는 이처럼 ‘사이버 세계’의 정점에 서 있다. 이라크전쟁 당시 다른 나라들이 우려했듯 미국은 주소를 없애는 방식으로 적국을 쉽게 공격할 수 있다. 주요 영어 단어의 ‘닷컴(.com)’ 도메인도 대부분 먼저 차지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눈에 익은 영문 단어의 인터넷 주소를 쓰려면 ‘co.kr’(한국의 경우)와 같은 국가 도메인을 붙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용자 접근성에서 그만큼 뒤처질 수밖에 없다. 세계적 인터넷 기업이 미국에 유독 많은 것에는 이런 환경이 적잖게 작용했다.

○ 인터넷 권력을 향한 도전들

사이버 세계가 실제 사회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면서 ICANN 체제에 대한 도전이 이어졌다. 첫 번째 도전은 2003년 열린 ‘제1회 정보사회세계정상회의(WSIS)’에서 나왔다. 중국과 브라질, 러시아, 인도, 이란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ICANN이 인터넷 관리 권한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과 정치적 이해를 같이하던 유럽이 ICANN 체제를 지지하면서 반(反)ICANN 진영의 반발은 실패로 끝났다. 유럽으로서는 중국과 러시아가 ‘사이버 권력’을 갖는 것이 미국의 독점보다 불편했다.

2012년 두바이에서 열린 ‘국제전기통신 세계회의’에서 양 진영은 다시 충돌한다. 당시 ICANN 찬반 세력 간에 표 대결까지 벌어졌다. ICANN이 아닌 국제기구 ITU가 인터넷도 관장한다는 개정안에 총 151개국 중 89개국이 찬성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이 개정안에 서명을 거부했다.

회의 직후 미국 대표 인터넷 기업 구글은 ‘일부 국가의 정부가 인터넷의 자유를 위협하려 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 인터넷 권력을 국가별로 똑같이 나누려는 시도를 ‘민간(ICANN)이 소유한 인터넷에 대한 통제 시도’로 포장한 미국의 전략이었다. 결국 개정안은 유명무실해지는 듯했다.   

▼ 10월 부산 ITU회의때 ‘끝장 토론’ 가능성 ▼

하지만 불과 1년 만인 2013년 전세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 국가안보국(NSA) 감청’을 폭로하면서다.

○ ITU 전권회의…인터넷 거버넌스 분수령

스노든의 폭로는 ICANN 체제를 지지하던 유럽 국가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미국이 유럽 국가들의 정상 휴대전화까지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유럽연합(EU)에서조차 “미국과 별개의 인터넷 체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 올해 3월 미국 정부는 2015년 9월까지인 ICANN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백기를 들었다.

이제 ‘누가 인터넷 거버넌스를 맡을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진다. 당장 이달 23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리는 ‘인터넷 거버넌스 회의’에서 격론이 오갈 예정이다. 이후에도 주요 회의가 줄줄이 예정돼 있다. 6월 영국 런던에서 50차 ICANN 정례회의, 9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이 개최된다.

논쟁의 분수령은 10월 부산에서 열리는 정보기술(IT) 관련 최고 의사 결정 모임인 ‘ITU 전권회의’다. 193개국 장차관급 인사로 구성된 대표단 3000여 명이 참석해 ‘끝장 토론’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 상용화 20주년을 맞은 한국 정부는 ITU 전권회의를 통해 사이버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보다 강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IT 분야의 세계 표준을 결정하는 최종 권한을 가진 ITU 표준화 총국장 선거에 처음 출마한다. 또 사물인터넷(IoT) 등 주요 미래형 인터넷 관련 의제를 주도해 나가기로 했다. 회의를 앞두고 ‘개방성 다원성 보안성 유연성 협력성 균형성’ 등 6대 인터넷 거버넌스 원칙을 제시해 국제사회로부터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은 핵심 사안인 인터넷 주소 관리 권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유보적이다. 외교적 균형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재천 인하대 정보통신대학원 교수는 “미국과 다른 나라 간 정치적 대결로 흘러가고 있어 한국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실용적 노선을 택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인터넷 거버넌스(Internet Governance) ::

인터넷에 대한 ‘관리 체계’로, 인터넷의 개발과 활용에 대한 공통된 원칙과 규정, 의사결정 절차 등을 일컫는다. 핵심 쟁점은 인터넷 주소 관리 권한이다. 정부의 통제, 개인정보 수집, 보안, 정보격차 해소에 대한 원칙 등도 인터넷 거버넌스에 포함된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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