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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인간관계의 피로감… 수박씨처럼 뱉어, 그냥 툭툭

입력 | 2014-04-12 03:00:00

◇수박/이은조 지음/256쪽·1만2800원·작가정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이는 것이 진짜인지에는 다들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각자 착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으로 등단한 이은조(43)는 우리 인생에 덧씌워진 그 한 겹을 기어코 들춰내고 만다.

‘전원주택’에서는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가 떠오른다. ‘나’는 조용한 삶을 꿈꾸며 남편, 아들과 함께 전원주택으로 이사한다. ‘봄에는 꽃씨를 뿌리고 겨울에는 눈꽃 모자를 쓰리라’는 소박한 소망이었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잡일, 전원의 호사를 갈망하며 휴일마다 들이닥치는 불청객들. 들쥐가 야금야금 뜯어대는 방충망처럼 가족의 꿈도 시들어간다. 아이보리 빛깔 대리석이 깔린 전원주택은 단절된 쇼윈도의 삶과 다르지 않다.

표제작의 주인공 난주는 가슴에 멍울 같은 수박 한 덩이를 품고 살아간다. 빠듯한 집안 형편에 어머니에게 ‘너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을 끝내 듣지 못했고, 사고만 치는 친정오빠는 버겁기만 하다. 결혼 8년 차에도 좀처럼 임신 소식이 없다. 난주는 홀로 찾은 사찰 앞 길거리주점에서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어낸 듯한 노파와 함께 수박을 먹는다. 노파는 말한다. “수박씨는 꼭 뱉어내야 돼. 가슴에 담고 있으면 안에서 수박이 열린다고. 씨가 있다고 수박을 안 먹으면 미련한 거지. 씨앗은 뱉으면 돼. 그냥 툭, 툭…….”

친구, 연인, 가족이라는 관계의 실상은 각자의 욕망이 투쟁하는 아귀다툼이다. 주인공들은 타인을 향한 불만과 요구를 터뜨리지 않고 가슴에 담아두며 관계의 피로에 시달린다. 등단작 ‘우리들의 한글나라’에서 한글폰트 디자이너인 서영과 정연은 입사동기이지만 친구라는 이름이 민망해진 사이이고, ‘바람은 알고 있지’에서 혜리는 안락한 가정을 이루기 바라지만 상우의 목표는 오직 경쟁사회에서의 생존이다. 단문이 속도감 있게 치고 나가는 장면의 틈새에서 어느덧 비밀을 들켜버린 것 같은 서늘한 기운이 번져온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