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녕 논설위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공천제 폐지나 무공천이나 결과가 같으니 그게 그것 아니냐고 우길 수도 있다. 백보 양보해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이번엔 두 사람이 진짜 국민과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겨 무공천을 택했던 것인지 따져보자.
2013년 4월 재·보궐 기초선거 때 새누리당은 후보 공천을 하지 않은 반면 당시 민주당은 공천을 했다. 대선이 끝난 지 불과 4개월밖에 안 된 터라 지금보다 오히려 더 국민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겨야 할 시점인데도 민주당은 무공천을 거부했다. “법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도 법이 그대로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 후 무공천으로 돌아서서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김한길 대표가 약속 위반을 ‘거짓의 정치’라고 몰아칠 정도로 그 당시 국민과의 약속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다면 굳이 공천제 폐지안을 당원 투표에 부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대선에서 약속한 바니 그대로 밀고 나가면 된다. 가결로 결론이 났기에 망정이지 만약 부결됐으면 어쩔 뻔했나. 당원 투표에 부쳤다는 것 자체가 국민과의 약속은 안중에 없었다는 얘기 아닌가.
결과적으로는 당시 민주당은 약속을 지키게 된 모양새가 됐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국민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당원들의 선택으로 공천제 폐지를 채택했을 뿐이다. 반대로 새누리당은 그 후 내부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공천 유지로 돌아섰고, 결과적으로 약속을 어기게 됐다.
기초공천제 폐지를 가장 먼저 약속했던 안철수 대표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2013년 8월 자신의 싱크탱크인 ‘정책네트워크 내일’ 주최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공천제 폐지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실시하자”고 수정 제안했다. 1차로 기초의원에 한해 공천제 폐지를 적용하고, 그 다음 선거에서 2차로 기초단체장으로 확대 적용하자고 했다. 안 대표 역시 대선 공약을 소중히 여겼다면 이런 식으로 말을 바꿀 수는 없다.
안 대표가 공천제 폐지를 약속했던 대선 무렵엔 공천할 정당도 없었고, 국회의원도 아니었다. 2년 뒤 6·4지방선거 참여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정 제안할 당시엔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신당 창당을 준비 중이었으며, 6·4지방선거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공언한 뒤였다. 여건이 달라졌으니 생각도 그에 맞게 달라진 것 아니겠는가.
새정치연합의 출범은 민주당과 안철수 세력이 합쳐져 ‘아군끼리 총질하는’ 야권 분열 상황이 사라졌기 때문에 지방선거 구도에서 중대한 사정 변경에 해당한다. 이를 간과한 채 김한길 안철수 대표가 독단으로 무공천을 밀어붙였으니 사달이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민주당은 당원 투표로 공천제 폐지를, 새정치연합도 사실상 당원 투표로 무공천 철회를 채택했다. ‘국민과의 약속’ 존중은 애당초 없었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