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만두고 미국 캘리포니아 스탠포드대학에서 연구원 생활을 할 때 찍은 아몬드꽃. 그의 꽃사진 중 드물게 보는 \'전경성 사진\'인데 그는 은퇴 후 알레스카나 시베리아 몽고의 대평원에서 이보다 더 스케일이 큰 꽃 사진을 찍겠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꽃 촬영기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꽃과 식물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한다. 보통 사람 수준의 꽃 이름만 알고 있는 기자에게 끝도 없이 나오는 꽃 이름과 그 생김새를 매치시키는 건 쉽지 않다. 그만큼 박 회장은 꽃에 대해 '박학다식'하다. 꽃 이야기를 들으면서 꽃과 전혀 연관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정통 경제관료가 '왜 꽃에 필이 꽂혔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가 생겼다. 박 회장은 북한어린이들에게 풍진예방주사를 지원하기 위해 '꽃이 사랑이다'는 기금 마련 사진전(12~25일·서울 인사동 나우 갤러리·02-725-2930)을 열고 있다. 그에게 사진을 통한 꽃과의 인연에 대해 물어봤다.
12일 서울 중구 명동 은행연합회관 회장실에서 박병원회장이 꽃사진을 찍을 때 사용하는 렌즈일체형 소니카메라를 소개하고 있다.
꽃무릇은 낙화하지 않고 꽃자체가 그대로 마른다. 낙화를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이 독특하다고 여겼지만 이 사진을 보니 개화한 꽃에서 보는 화려함에 감탄하는 마음도 일리있지만 다 마른 꽃에서 느끼는 감정도 수긍할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꽃이 사랑이다' 사진전 오프닝에는 한국경제를 주름잡던 60, 70대의 전직 경제 관료들이 많이 찾아왔다. 기자 짐작에 그들은 사진으로 제2인생을 풍요롭게 꾸려가고 있는 박 회장을 부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12일 서울 인사동 나우갤러리에서 열린 '꽃이 사랑이다' 오프닝에서 인삿말을 하는 박병원 은행연합회장.
"부러워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사진 가르쳐 달라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사진을 어디서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 뭘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또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그래서 다른 데에 알아보라고 합니다.(웃음)"
사진전을 주제로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사진으로 밥벌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 더더구나 프로는 더욱 아니기에 내가 찍은 꽃 사진은 볼품없는 사진에 불과하다"라며 애써 '실력'을 감춘다. 그러면서도 올해 11월경 은행연합회장에서 물러나 또다시 '백수'가 되면 시베리아나 몽골의 들판을 뒤덮고 있는 야생화와 한국의 '큰나무'들을 찍고 싶다는 속내를 비쳤다. 끝이 안 보이는 벌판에 지천으로 널린 야생화를 찍고 싶다는 바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기자에게는 클로즈 위주의 꽃 사진으로는 채울 수 없었던 '작가적 의도'를 마음껏 구현해보고 싶다는 또 다른 도전의 의미로 들렸다.
박병원회장은 '낙화'한 꽃들이 개화한 꽃들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사진은 2012년 하늘재 트레킹 중에 찍은 낙화한 쪽동백이 계곡물을 따라 흘러가는 모습이다. 그는 이 사진을 '꽃이 사랑이다' 포스터에 썼을 정도로 아낀다.
은행연합회관 회장실에서 1시간 넘게 진행한 인터뷰 말미에 '꽃을 통해 들은 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어렵게 답했다. '난 체'를 꺼려하는 그답게 에둘러서 말하는 통에 몇 번을 묻고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그가 왜 꽃 사진을 찍고 전시하고 북한 어린이들을 도와주는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12일 서울 인사동 나우갤러리에서 열린 '꽃이 사랑이다' 오프닝에서 유홍준 전문화재청장에 쪽동백 사진을 설명하는 박회장.
박 회장은 "꽃은 세상에 많고, 초상권이 없어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기에 꽃을 찍는다"고 했지만 속내는 다른 듯하다. 다른 꽃은 물론이려니와 같은 꽃들조차 간절하게 말하는, '나의 존재를 알아 달라'는 수많은 꽃의 요청에 응하느라 사진기를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사진은 사진가의 존재이유를 증명하기도 하지만 피사체의 존재이유도 증명함을 그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