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내현-차재은 교수 논문 ‘17∼19세기 여성의 지칭어 변화’
조선시대 기혼 여성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던 ‘씨(氏)’나 ‘성(姓)’ ‘소사(召史)’는 호적대장 같은 문서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에서도 널리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의 신분이나 직역 변화에 따라 아내의 호칭이 일생 동안 여러 번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19세기 후반 평민 기혼 여성들이 맷돌질을 하는 모습을 그린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법적으로 노비 신분인 춘향이는 호적상에 이름과 함께 천첩(賤妾)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춘향이가 양반가의 딸이나 평민 집안의 딸이었다면 호적상 기록이 달라진다. 춘향이라는 이름은 빠지고 각각 ‘성씨(成氏)’나 ‘성소사(成召史)’라고만 적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이처럼 기혼 여성을 칭하는 말이 신분에 따라 달랐다. ‘민족문화연구’ 최신호에 실린 권내현 고려대 교수(역사교육학)와 차재은 경기대 교수(국문학)의 논문 ‘17∼19세기 여성의 지칭어 변화’에는 기혼 여성의 신분을 가늠케 한 호칭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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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교수는 “재판장에서도 여성이 서로를 ‘김소사가…’나 ‘박소사는…’ 하고 불렀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으로 볼 때 이런 호칭은 문서상의 기록 외에 입말로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호칭은 주로 남편(남편 사망 시 아들)의 신분이나 직역(직업의 영역이나 범위)에 따라 변했다. 남편의 신분 변동으로 평생 동안 호칭 변화를 여러 번 겪는 여성도 많았다. 논문에 언급된 경상도 단성현(오늘날 경남 산청군) 도산면에 살았던 평민 남성 김광오의 부인은 1759년 이소사(李召史)로 불리다가 3년 뒤 남편의 직역이 중간층인 ‘업유(業儒·유학을 닦는 서자)’로 상승하면서 이성(李姓)으로 바뀐다. 1780년 남편이 상류층인 ‘유학(幼學·벼슬 없는 유생)’이 되자 이씨(李氏)로 불리다가 1783년 남편이 중간층 ‘교생(校生·평민 출신으로 향교에 다니던 생도)’으로 신분이 낮아지자 다시 이성(李姓)으로 내려갔다.
반면 1678년 각각 22%와 65.4%였던 소사로 불린 여성과 이름을 쓰는 여성은 1860년 각각 4.7%와 1%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16, 17세기 하나의 계층으로 자리 잡은 중인들이 스스로를 평민층과 구분 짓기 위해 18세기 중엽부터 쓰기 시작한 ‘성’도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사용비율이 크게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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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