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사실 로스코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생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한 가지야. 어느 날 블랙이 레드를 집어삼키는 것이지.” 레드는 열망이고 블랙은 절망이다. 레드는 밀려오는 것이고 블랙은 사라지는 것이다. 로스코는 마지막 순간 레스토랑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선금을 돌려준다. 돈 대신 자신의 ‘레드’를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조수 켄에게 말한다. “너는 해고야. 네 세상은 저 밖에 있어! 저 밖에서 네 날개를 펼치란 말이야.”
부와 명성을 다 가진 중년의 로스코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젊은 켄. 변화를 두려워하는 로스코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켄. 두 사람에게는 부모와 자식, 물러갈 세대와 이어갈 세대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자. 저성장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세대 갈등은 이제 ‘세대 전쟁’이라 할 만큼 위험수위에 와 있다. 정년 연장, 노령연금 등 새로운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어느 쪽도 자기 몫을 양보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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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73년 전 이미 이 사태를 예감했다. “100년이 더 흐른 뒤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여든 넘은 노인일지도 모르겠다. 육십 먹은 젊은이들은 그들을 몰아내려고 안달을 하겠지만 중요한 자리는 이미 노인들이 전부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어떤 진보도 불가능하다.”(‘노인들을 위한 나라’)
러셀이 한탄한 대상은 노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변화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글을 쓸 당시 59세였던 러셀 자신을 포함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머리로는 확신하지만, 진짜 변화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은 급진주의자는 무능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서글픈 상황에 처해 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조차 ‘아버지를 죽일 수 없는’ 무기력한 젊은 세대와, 변화를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무능한 기성세대. 세대 전쟁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khmzi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