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홍성남 신부[잊지못할 말 한 마디]소설가 백영옥
홍성남 신부님에 대해 알게 된 건, 그의 사제관 안에 커다란 ‘샌드백’이 놓여 있었단 친구의 말 때문이었다. 바로 샌드백의 정체가 도무지 화가 안 풀리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패대기치기 위한 ‘분노해소용’이란 것이었다. 몇 번 용서해야 하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은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사랑과 화해를 권해야 할 신부가 어째서 방 안에 샌드백 걸고 두들겨 팬단 말인가.
인간은 정말 변하는 존재일까. 명동성당에서 심리 사역 중이었던 신부님과 얘길하다가 문득 내 오랜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신부님이 내게 해주었던 말은 이런 거였다.
“성격은 안 바뀌죠. 장미가 백합이 되진 않아요. 근데 많은 사람이 자기는 할미꽃인데 장미가 되고 싶어 해요. 많은 종교는 그걸 회개라고 생각하고요. 가톨릭의 성인, 멘토? 그들과 같아지면 안 돼요. 인간은 그렇게 될 수도 없어요. 나를 있는 그대로 피워야죠. 민들레와 제비꽃이 왜 백합이 돼야 합니까. 민들레고 제비꽃이라도 그것이 시들고, 활짝 피고는 자신에게 달려 있어요. 닭이 독수리가 되는 게 아니고, 새장 속을 나와 하늘 높이 나는 게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 얘길 들었을 때, 뭔가 가슴을 툭 치는 것 같았다. 상태가 바뀔 뿐, 본질이 바뀌지 않는단 얘기를 듣는 순간 ‘변화’에 대한 내 고정관념 하나가 깨진 셈이다. 말하자면 시든 상태가 아니라 피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 가장 나답게 잘사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 말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딸이나 며느리로, 엄마로, 혹은 직장의 과장으로, 팀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얼굴로 사는 일.
그제야 김훈의 이 말이 돌연 이해되었다.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이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노동’ 때문에 망가진 사람이란 말, 뭘 하고 사는지 도대체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라는 그 얘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