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배수아 옮김/315쪽·1만3000원/문학과지성사실존인물 엥겔하르트 일화 소설로
문명에 염증을 느낀 소설의 주인공 엥겔하르트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 카바콘에서 헝겊 한 조각만 두른 채 나체상태로 생활하고 코코넛 열매를 양식으로 하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세운다. 사진은 원시 문명을 동경하며 남태평양 타히티 섬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프랑스 화가 고갱의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년). 동아일보DB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소박하며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는 엥겔하르트의 이 ‘위대한 고립’ 선언은 당시에도 수많은 지친 영혼들의 눈과 귀를 혹하게 만들었나 보다. 반문명주의와 염세주의, 허무주의, 금욕주의, 목가주의로 빚어진 엥겔하르트를 만나려고 채식주의자 아우에켄스, 피아니스트 뤼트초프 같은 사람들이 섬을 찾아온다. 하지만 엥겔하르트 눈에 비친 이들은 제사보다 젯밥에 눈먼 배신자이거나 자신의 통치권을 노리는 잠재적 경쟁자일 뿐이다. 작가는 자신의 추종자들과도 불화하며 스스로를 절대 고독으로 밀어넣는 주인공의 모습을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처럼, 때로는 거룩한 순교자처럼 그려낸다.
스위스 태생의 독일인인 저자는 소말리아, 인도, 스리랑카, 온두라스, 네팔, 아르헨티나 등 세계 각지를 떠돌며 생활한 사진작가이자 성우이기도 하다. 2006년에는 북한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총체적 기억: 김정일의 북한’이라는 사진첩을 내기도 했다. 소설가 배수아가 맡은 번역도 매끄러워 술술 읽힌다. 작품 중간 중간 카메오처럼 주인공을 스쳐가는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같은 동시대 독일 문인을 만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