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우리나라 은퇴자 입장에서 보면 부러운 수준이지만 레베카 씨는 영국의 살인적인 물가를 감안하면 그렇게 풍족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먹고살기에는 충분하지만 1년에 한두 번 여행 다니기에는 빠듯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가 더 일할 수 있었는데도(영국은 65세였던 법정 정년 제도를 2011년 없앴다) 62세에 은퇴했다는 점이다. ‘노후의 돈 걱정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자식한테 돈 들 일 없고 아프면 나라에서 고쳐주니까요. 아등바등 돈 벌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수입의 절반 가까이는 세금으로 나가기도 하고, 어쨌든 즐겁게 사는 일이 더 중요하잖아요.”
이 나라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다. 영국은 복지국가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1906년에 노령연금법이 제정되었고, 1946년에 사회보험법에 의해 공적퇴직연금 제도가 도입됐다. 1970년대 이후 경제가 나빠지면서 ‘고복지 고부담’의 복지 정책 기조를 ‘저복지 저부담’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정책이 실행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영국 국민들이 체감하는 복지 정도는 높은 것 같았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증명된다. 201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복지 수준을 비교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영국의 복지충족도(공공사회복지 지출 비율, 공적연금 소득보장률, 건강보장률, 고용보장률 등)는 0.56점으로 OECD 국가 중 18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민복지체감도(주관적 행복도, 여가시간, 자살률, 출산율, 평균수명)는 0.74점으로 6위였다. 한마디로 영국은 스웨덴 같은 ‘고복지 고부담’ 국가에 비해 돈을 훨씬 덜 쓰면서도 국민들의 복지체감도를 높이는 데 성공한 경우다. 오랜 복지 정책의 역사를 통해 국민이 원하는 것과 국가가 해줄 수 있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았다고 할까. 복지 시스템의 신뢰가 구축된 것이다.
정말 부러운 일이다. 생각해 보라. 안정된 연금제도를 통해 은퇴 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없앨 수 있다면, 현재의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10억 원 모으기’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예상치 못한 사회적 위험에 빠지더라도 국가의 안전망이 나를 받쳐줄 거라는 믿음만 확고하다면 노후에 대한 공포감으로 몸을 떠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영국 노인들이 행복해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어느 동네에나 있는 공원, 도서관, 펍 같은 ‘인프라’ 때문이다. 우리는 돈이 있어야만 어디든 갈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돈 때문에 취미활동도 못하고 집에서 TV만 보거나 할 일 없이 지하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노인들이 많다. 하지만 영국 노인들은 가까운 공원에 가서 운동을 하거나 동네 도서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동네 펍에 가면 약속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친구나 이웃이 있으니 외롭지 않다.
결국 영국 노인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건 ‘돈’이라는 경제적 요소도 있지만 사회적 요소가 더 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 소통, 가치관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 중요한 건 신뢰감이다. 한번 상실하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말이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