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금’
김춘수(1922∼2004)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물은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광고 로드중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화가 윤병락 씨의 ‘녹색 위의 붉은 사과’.
김춘수 시인은 이미지의 미술 대신 언어의 마술로 그리움에 익어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사과의 빛깔과 향기를 우리 눈앞에 불러낸다. 자연의 결실을 매개로 삼아 내면적 성숙으로 스스로를 채워가는 과정을 표현한 시는 생명의 충만함과 존재의 경이로움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잃어버렸을까.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딸기 복숭아 포도 등 갓 수확한 제철 과일을 마주하며 ‘이제 봄이 왔구나’ ‘여름이 훌쩍 갔네’ 하며 계절 변화를 떠올리던 순수의 시대는…. 동네 마트에서 한 해 내내 사과를 사먹게 되면서 우리는, 시장에 처음 얼굴 내민 햇사과를 집어 들어 가을을 비로소 가을답게 맞이하고 미각으로 가을을 확인했던 그날의 행복을 빼앗겨 버렸다. 아마도 요즘 아이들에게 제철 과일의 분류는 일상이 아니라 교과서를 통해 배워야 하는 골치 아픈 학습의 대상일 게다.
구체적인 것은 점점 사라지고 추상화되어 간다. 내 호주머니 속 스마트폰 분실 신고는 잊지 않아도 제철 과일의 추억에 대한 실종 신고는 없다. 자연 생태계와 모든 동식물이 오직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우겨대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인간은 스스로를 외계인으로 만들고 있으면서, 외계인의 존재를 궁금해한다.
광고 로드중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