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경제관련법 200여개 표현 두루뭉술…모호한 법령 탓에 소송만 늘어난다

입력 | 2013-09-03 03:00:00

기업들 “공무원 자의적 해석 우려”




중견기업 A사의 경영진은 일감 몰아주기 금지 조항이 7월 개정된 뒤 잠을 설치고 있다. 절삭공구 제조원가를 낮추고 판매를 늘리려고 국내외에 17개 계열사를 설립했는데 이로 인해 규제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원래 공정거래법에는 계열사에 ‘현저히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면 안 된다’고 돼 있었는데, 이번에 법이 개정되면서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바뀌었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라야 규제를 받는지 알 수 없으니 불안해질 수밖에요.”

A사 전무는 “결국 법을 해석해 집행하는 공무원의 권한만 강화시켜 준 것 아니냐”며 “담당 공무원에게 로비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모호한 법 조항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특히 올해 들어 국회를 통과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에 ‘부당한’ ‘현저한’ ‘통상적’ ‘정상적’ ‘상당히’ 등 명확하지 않은 문구가 많아 기업들의 고충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동아일보가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함께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치는 법과 그 시행령을 분석한 결과 각각의 법령에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150개가 넘는 모호한 표현이 담겨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이하 시행령 포함)에는 부당한, 현저한, 상당히 등 모호한 표현이 156개나 있었다. 근로기준법은 13개, 법인세법에는 23개, 조례특례제한법에는 15개의 모호한 표현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제계는 이런 모호한 표현이 공무원의 자의적 해석이나 재량권 남용을 가능케 해 기업 경영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사안이라도 경우에 따라 다른 처분이 내려질 수 있고 불필요한 소송도 늘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의 비용을 늘리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법원 판결도 오락가락… “법조항 명확한 표현 필요”▼

공정거래위원회는 2006년 SK텔레콤에 “시장 지배력을 남용했다”며 시정명령과 함께 3억30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 회사가 음원서비스 ‘멜론’을 시작하면서 자사 휴대전화 사용자들이 멜론에서 구매한 음악파일만 재생할 수 있게 한 것을 문제 삼았다. 공정위는 ‘부당하게 소비자의 이익을 현저히 저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금지하는 공정거래법을 근거로 SK텔레콤이 부당행위를 했다고 판단했지만 SK텔레콤이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2011년 소비자의 이익을 현저히 저해할 우려는 없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최근 통상임금 문제에 관한 판결이 엇갈리는 것도 법조문의 해석을 둘러싼 이견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제단체들이 “기업 경영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할 만큼 통상임금 범위 확대 문제는 기업들에 파급력이 크지만 정작 근로기준법에는 통상임금에 관한 정의(定義)가 없다. 근로기준법 시행령 제6조 1항에 ‘근로자에게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소정 근로 또는 총근로에 대해 지급하기로 정한 급여’로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법원은 회사가 상여금을 고정 또는 정기, 일률적으로 지급했는지를 통상임금의 판단 기준으로 보고 있지만 고정적 또는 정기적이라고 보는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때그때 해석이 다르다. 예컨대 대법원은 지난해 3월 “정기(고정)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지만 인천지방법원은 올해 5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엇갈린 판결을 했다. 김동욱 한국경영자총협회 기획홍보본부장은 “법원의 판결을 보면 상여금을 고정적으로 지급했는지를 가릴 때 기준이 되는 기간이 제각각”이라며 “기업으로서는 어떤 판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 조항은 다양한 상황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명시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모호한 표현은 법원이나 행정부가 자의적 판단을 내리게 하는 문제를 낳는다”며 “분쟁을 줄이려면 법 조항의 표현을 최대한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창규·김용석·강유현 기자 k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