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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둔감성 vs 과민성

입력 | 2013-08-13 03:00:00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

어느 날 바짝 마른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진료실을 찾았다. 그러면서 “제가 이상한 건지, 아내가 이상한 건지 판단을 좀 해 주세요”라고 했다. 사정인즉슨 아내가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진의를 따져 묻고 짜증을 낸다는 것이다. 대개는 부부 문제가 있을 때 남자 쪽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으므로 나는 아내 이야기도 듣기로 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홀대하거나 무시한다는 예를 들기 시작했는데 (대개는 필자가 집에서 하는 행동과 비슷해서 뜨끔하기도 했지만) 그다지 큰 문제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부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폐경을 맞으면서 하루 종일 몸이 처지고 잠만 오고 하루에도 기분이 여러 차례 바뀌고 짜증이 쉽게 난다”고 했다. 폐경기 우울증이 의심됐다. 꾸준히 면담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한 뒤로 그 부인은 “기분이 좀 편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증상도 없어졌다”고 말했다. 1년 후에 아내를 병원에 데려다 주러 온 남편을 보니 조금 더 살이 오른 것 같았다.

우울할 때 나타나는 증상 중에 ‘대인 관계 과민성’(interpersonal hypersensitivity)이라는 증상이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대인 관계 과민성보다는 대인 관계 둔감성이 더 문제인 면이 있다. ‘이 얘기를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느낄까’ ‘우리 애가 이렇게 시끄럽게 하면 다른 사람들 대화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은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미국인들과의 저녁은 좀 색다른 경험이었다. 미국에서 외국인 교수님이 주최한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에 연구실원들의 가족이 다 모였을 때 필자는 ‘왜 피상적인 대화들만 오고 갈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혹시 민감한 부분이 있을까봐 그런 대화는 피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 후 오랫동안 자녀가 없는 집에 “왜 애를 낳지 않아요? 빨리 낳아야지요”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흔한 말로, 덕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혹시 불임 부부여서 그 때문에 고생하고 불화도 겪지는 않을까? 궁금하지만 물어보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사려 깊은 사람은 비교적 적다. 도리어 얼버무리려는 부부에게 “시험관 시술이라도 받으라”며 조언까지 한다. 서구인들이 서로 연봉이나 사는 곳을 묻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우울증 환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켜야 하는 때가 있다. 바로 추석이나 설날을 앞둔 때다. 좋은 말만 해도 서로 편한 관계는 아닌데, 굳이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은 자녀가 있는 친척 앞에서 자기 자녀의 명문 대학 생활을 이야기한다거나 퇴직 우울증에 빠진 사람 앞에서 ‘남편이 일찍 퇴직해서 연금 받고 부부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니 얼마나 좋으냐’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기 때문이다. 환자들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켜 두면 이 시기 이후에 우울증의 급격한 악화를 비교적 막을 수 있다.

이렇게 둔감한 경우도 문제이지만 때로는 과민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증상이 심하다면 이는 우울증의 증상이므로 특히 평소 불안 수준이 높은 사람일 경우 전문가를 만나보는 것이 좋다. 전에 그렇지 않던 사람이 과민해졌다면 앞에 소개한 남편처럼 상대를 비난하거나 탓하지 말고 치료를 권해 보는 게 좋다. 만약 청소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죽 그래 왔고 여타 다른 증상들, 즉 무모한 소비나 행동, 충동성, 대인관계 불안정성, 자해 행동 등을 보인다면 경계성 인격장애 같은 성격장애를 의심해 볼 수도 있다. 이런 경우도 꾸준한 치료가 요구된다.

여러분들도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고 삐치는가?

물론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 너 때문에 상처 받았어. 네가 문제야’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상대에게 너무 완벽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 말이다. 너무 완벽한 것을 기대하면 항상 괴로울 수밖에 없다. 내가 완벽하지 못하듯 상대도 완벽할 수 없다.

언젠가 탈북민들을 돕는 일을 오랫동안 하신 분의 말이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는 말이었다. 꼭 탈북민이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돕거나 많이 만나다 보면 항상 실망을 하고 때로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 그분이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으면 그런 얘기를 하게 되었을까 안타깝기도 했지만 본래 사람이란 그렇게 약한 존재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어느 누구보다 많이 사랑했기에 많이 상처받았을 마더 테레사의 말을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너의 친구가 완벽한 사람이기를 기대하지 마라. 친구가 완벽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어라. 그것이 진정한 우정이다.”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