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금순(1951∼)
비로소 강물은
지리산 고원분지 운봉 땅에 고리를 박고
줄을 매달아 동편제 판소리 한가락으로 흐른다
내가 발자국으로 걸어온 몇 백리 길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 그리며 흐르고 흐른다
산내, 운봉, 주천, 구례, 하동으로
싸리꽃 찔레꽃 흐드러지게 핀 산속
막걸리주막의 외롭기만 하다는
할머니의 긴 넋두리도 흐른다
쌍계사 화개장터를 내려와
막차표를 끊어놓고 잠시 남도대교 아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피라미떼를 본다
강 건너 초록의 대숲 시퍼런 낫으로 산죽을 치는
소리 휘어 활시위소리 내며 흐른다
강물에 뜬 둥근 낮달에 늙은 내 얼굴을 비추어본다
멀리 있는 그대에게 흐르는 물로 초록의 편지를 쓴다
기행시(紀行詩)는 별 매력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읽은 기행시들은 대개 자연풍광과 시인 개인의 감상이 범상하게 담긴 시들로서 시인과는 생판 남인 나, 독자는 도무지 흥미가 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천금순이 순례하는 마음으로 우리 국토를 한 걸음 한 걸음 더듬어 다니며 길 위에서 쓴 시들을 묶은 시집 ‘아코디언 민박집’은 꽤 읽음직스러웠다. 시간과 돈에 여유가 나면 너도나도 해외로 나가는 요즘 풍조에, 우리 땅은 외국보다 낯설어 시의 소재로도 신선하다. ‘섬진강변에서’는 그 시집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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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는 도보여행은 삶의 찌든 때를 씻어주리. 발이 부르트도록 걸으면서 이것저것 되돌아보고 다른 고장 풍경과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생기를 되찾고 품이 넓어지리. 정신의 살은 찌고, 몸의 살은 많이 빠지리!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