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 국민대 명예교수
검사 시절 여름휴가는 그 시기를 선택하는 데부터 작은 구속을 받는다. 지금도 그렇다고 보지만, 대개 5일 내지 1주일간 주어지는 휴가는 더위가 절정인 7월 하순부터 8월 초순까지 2주일 사이에 희망자가 경합하기 마련. 일시에 많은 인원이 동시에 청을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한 사리이므로 휴가 시기를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밖에 없는데, 결국은 고참 경력이 아니면 개인적 특수사정이 있는 사람의 순으로 선택의 우선권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이의나 불평을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것들이 어느새 하나의 관행이랄까 조직원으로서의 당연한 미덕처럼 인식되어 있는 터이기도 했다. 중요 사건을 맡아 있거나 소속 부서의 당면한 과제를 처리 중인 검사는 스스로 휴가를 포기하거나 일단 기약 없는 연기 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필자의 경우 도시에서만 자란 아이들에게 시골의 자연을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휴가의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했던 까닭으로 젊은 시절에는 남해 바닷가나 청송의 주왕산, 가평 부근의 물가 등지로 며칠씩 다녔다. 하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시골 풍경이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한유(閑遊)하는 일 같은 것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아 실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캠핑을 한답시고 강변에 텐트를 한 번 쳐본 일이 있으나 부근의 대학생들이 밤새도록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아 잠을 못 잔 가족들로부터 예상치 못한 원망을 들은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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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0대 중반에 대학에서 처음 맞았던 휴가, 정확히 말하자면 여름방학은 완전히 그 실체가 달랐다. 그것은 이를테면 잠깐의 휴식이라기보다 약 2개월 동안 거의 완벽한 해방 또는 눈에 안 보이는 어떤 굴레로부터의 놓여남에 가까웠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따지고 보면 교육과 연구를 주된 임무로 하는 대학교수에게 강의가 없는 방학이라고 하여 매사에 자유롭다고는 결단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천국에라도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다.
참으로 순진하게도, 첫해에는 독일까지 가서 에어컨이 없는 차를 하나 빌렸다. 그 후 로만티크 가도를 거쳐 전혜린 선배께서 1960년대의 베스트셀러 격이었던 수상집에 써 많은 젊은이들에게 동경을 불러일으켰던 뮌헨의 영국공원과 슈바빙 거리까지도 가보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대부분의 교수들은 이런 기간을 이용하여 미뤄 두었던 논문을 쓰고 각종 연구 자료도 수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그렇구나! 다음 해는 사법시험 채점위원을 맡게 되어 온 여름을 거기에 매달리느라 방학의 자유로움을 또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말았지만, 그러는 사이 대학에서의 휴가의 바른 의미와 가치를 다소나마 터득하게 된 것은 망외의 축복이었다는 생각이다. 물론 대학의 행정책임을 맡게 되면 교직원 세미나라는 등의 이름으로 구성원 간의 화합이나 학교 발전을 위한 각종 연찬의 기회가 대개 여름휴가 직전에 이루어진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각종 사회봉사도 방학 기간이 최적의 기회라고 할 수가 있다. 결국 대학에서의 여름휴가는 연구 또는 교육 종사자로서 ‘놓여남과 이뤄냄’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재충전 또는 발전의 기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작은 경험이다.
대학과 공직을 떠난 지금 한 자유인으로서의 휴가는 어떨까? 전관예우 운운의 말이 따르는 변호사 업무는 처음부터 하지를 않았고, 맡고 있는 몇몇 공익적 성격의 일도 대개 그 일정이 예측 가능한 사정이므로 이미 일상의 업무로부터 해방된다거나 지적 재충전을 위한 휴가란 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가족에 대한 배려와 스스로의 침잠(沈潛)’을 위한 시간에까지 인색할 필요는 없다. 친지에 대한 문안이나 이웃을 위한 작은 봉사 그리고 무장무애(無障無애)의 상태로 스스로의 마음을 얼마간 비우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좋은 휴가 보내기의 방법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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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 국민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