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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무소유 시대]일본 저성장 풍속도

입력 | 2013-07-19 03:00:00

나 위해, 손주 위해 쓸때는 쓴다… 불황 모르는 실버파워




오랫동안 일본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인형 ‘리카’와 가족들. 리카와 엄마, 아빠에 이어 지난해에는 할머니 인형(뒷줄 오른쪽 왼손으로 턱을 괸 인형) ‘요코’가 출시됐다. 사진 출처 다카라토미

불황이 오면 모든 사람이 돈을 안 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최근 일본 기업들이 주목한 소비층은 노인들이다. 1970, 80년대 일본 경제 성장의 선봉에 나섰던 단카이(團塊) 세대들은 노후자금이 많고 연금도 풍족하게 받는 편이다. 금융회사 메릴린치 추산에 따르면, 순 금융자산 100만 달러(약 11억 원) 이상 보유 인구 170만 명 중 50세 이상 비중이 무려 80%를 넘는다.

이를 가장 먼저 눈치 챈 회사는 장난감 회사다. 다카라토미가 1967년 출시한 인형 ‘리카’는 여자아이들이 옷을 갈아입힐 수 있는 인형이다. 발매된 지 46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아이템이다. 리카 외에 주변 인물들 인형도 하나씩 출시됐는데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던 1969년에는 ‘패션 디자이너’인 엄마 인형이, 주5일제가 도입된 1989년에는 아빠 인형이 나왔다.

2012년 등장한 새 아이템은 ‘할머니’ 인형이다. 할머니 인형의 이름은 ‘가야마 요코’. 나이는 56세로 직업은 꽃가게 겸 카페의 오너다. 현대의 할머니상을 반영해 젊고, 예쁘고, 활동적인 성격이라고 장난감 회사는 소개한다.

장난감 회사 측은 “맞벌이 부부가 늘어 조부모 손에 크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할머니와 손자 손녀가 함께 놀 때 이용할 수 있도록 할머니 역할을 할 수 있는 인형을 만들어 달라는 고객의 목소리가 많았다”고 제품 출시 의도를 설명했다.

일본 백화점협회는 각급 학교 운동회 시즌이 겹치는 매년 10월 세 번째 일요일을 아예 ‘손자의 날’로 정한 뒤 다양한 할인 행사를 펼치고 있다. 2011년 7월 창간한 ‘손자의 힘’이라는 잡지는 온라인 숍을 운영 중인데 손주를 위한 장난감, 침구, 가구, 욕실용품을 판매한다. 욕실설비 전문업체 ‘이낙스(Inax)’가 생산하는 넉넉한 크기의 원형 반신욕 욕조는 ‘손주와 함께 조부모들이 목욕하기 쉬운 욕조’로 인기를 끌었다. 일본 내에서 ‘손자 비즈니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실버 파워는 이 밖에도 다양한 형태로 번지고 있다. 중년여성을 겨냥한 전용 헬스클럽인 ‘커브스’가 성공한 이유는 ‘노(NO) M’을 실천했기 때문. ‘노 M’이란 남자가 없고(No Men), 따라서 화장을 안 해도 되고(No Make-up), 마지막으로 거울이 없다(No Mirror)는 뜻. 전면 거울이 곳곳에 붙어 있는 헬스클럽은 몸매가 좋은 젊은 층에게는 자부심을 주겠지만 중·노년 여성들은 이런 곳에서 오히려 더 의기소침해지는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휴대전화 회사들도 전략을 바꿨다. 젊은 사람이 쓰는 똑같은 휴대전화에 불만을 토로하는 실버 고객이 많아져서다. 기업들이 내놓은 것은 ‘라쿠라쿠 폰’이다. 일반 스마트폰처럼 터치 방식이지만 메일 사진 등 앱을 활용할 때 따로 사용법을 배우지 않아도 쉽게 조작하도록 아주 간단하게 만들었다.

도요타는 30대를 타깃으로 ‘초봉으로 도전하는 스포츠카’를 표방한 후륜구동 스포츠카 ‘하치로쿠(八六, 86)’를 약 2100만 원에 내놓았지만 도쿄 시부야에서 열린 첫 시승 및 상담회에 몰려든 것은 놀랍게도 60대 전후의 시니어 남성들이었다. 예약 개시 한 달 만에 50세 이상 장년층의 주문대수가 2000대를 돌파했다. 젊은 층은 차를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사지 못하지만 돈 있는 중·노년들은 청춘 시절에 꿈꾸었던 ‘스포츠카’ 로망을 이루겠다며 몰려들었다고 한다.

여행 대기업 JTB도 실버파워를 겨냥해 ‘다비사이사이’라는 고급 브랜드를 만들었다. 특급 호텔이나 리조트 숙박은 기본이고, 유명 셰프의 요리를 맛보고, 전용 리무진을 이용해 세계 각지를 유람하는 프리미엄 투어 패키지가 주목받고 있다.

저성장 시대라고 해도 사람들이 돈을 아끼지 않는 상품은 분명히 있다. 노무라종합연구소가 2000년과 2012년 일본인 1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격보다 개인 취향에 따라 물건을 구매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비싸도 마음에 든다면 돈을 내는 ‘프리미엄 소비’는 2000년 13%에서 2012년 22%로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반면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구입하는 소비 경향은 40%에서 27%로 감소했다.

예를 들어 실내복 브랜드 ‘제라토 피케’는 집에서 입는 실내복이 한 벌에 약 7만 원으로 싸지는 않지만, 집 안이라고 해서 늘어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싶지 않다는 20, 30대 젊은 직장여성들에게 인기를 끈다.

장주희 노무라종합연구소 서울 컨설턴트   
정리=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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