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대통령 “업고 다닐것” 독려에도 냉담
새 정부 출범 직후인 4월 4일 30대 그룹 사장단이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만나 전년보다 7.7% 증가한 149조 원을 올해 설비 및 연구개발(R&D)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과는 상당한 온도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기업들은 새 정부 출범을 축하하는 뜻에서 신규 채용도 12만8000명으로 전년 채용 대비 1.5% 늘리기로 했다. 그러나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30대 그룹을 조사한 결과 4개 그룹은 올해 고용을 당초 계획보다 줄이겠다고 밝혔다.
국내 대기업 투자는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정무적 판단’이 개입되는 일이 많다.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새 정부 출범 초기에는 투자 계획을 늘려 잡는 게 일반적이다. 증권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때도 집권 첫해 상반기 30대 그룹 계열사의 투자 공시 건수는 집권 중반기인 3년차 때보다 많았다.
하지만 올 상반기는 다르다. 극심한 불황이 계속되는 데다 경제민주화와 경제 활성화 사이에서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지다 보니 기업들이 투자 계획을 이행하는 시점을 놓친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4월 발표는 새 정부에 대한 기대를 담아 연초에 세운 계획을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며 “정부만 믿고 투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경기 등을 고려해 어쩔 수 없이 투자를 줄이는 곳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5월 초 부랴부랴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열어 투자를 독려했지만 실제 규제 완화까지로 이어진 것은 거의 없다. 지주회사의 증손(曾孫)회사에 대한 최소 지분 보유 규제를 풀려 했지만 국회가 반대하는 바람에 SK그룹 등은 2조30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보류하고 있다. 서비스업 규제 완화가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이 분야의 대규모 프로젝트들도 아직 캐비닛 속에 머물고 있다.
총수 부재 상태인 SK, CJ, 한화그룹의 대규모 투자가 사실상 올 스톱 상태인 점도 투자 부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들이 투자를 늦추면서 정부와 재계가 기 싸움을 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정부가 규제 완화 등 ‘당근’을 내놓으며 투자를 독려하지만 기업들은 경제민주화 법안에 대해 정부가 확실히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투자 곳간’을 열지 않겠다고 버티는 구도다.
재계는 최소 수조 원의 추가비용을 불러오는 통상임금 범위 확대나 매출액의 5%까지 벌금을 물리는 환경규제 등이 투자를 위축시키는 대표적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정부가 투자를 독려하면서도 이런 문제에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자 “경제를 살리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비판도 공공연히 내놓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업어 주는 것은 고사하고 (규제로) 발목이나 잡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꼬집었다.
특히 기업인들은 규제 정책을 주도하는 관료 그룹을 겨냥해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언론사 논설실장 및 해설위원실장들과의 오찬에서 “경제민주화 주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한 것을 두고도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대기업을 타깃으로 한 경제민주화 입법은 일단락됐는지 몰라도 하반기(7∼12월)에는 통상임금, 근로시간 단축, 상법 개정안 등 기업에 부담을 지우는 각종 법안이 대기하고 있는데 이런 법안들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건지, 그건 경제민주화 법안이 아니라고 보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규제 움직임에 큰 부담을 느끼는 기업으로선 투자 확대는 언감생심”이라며 “고용률을 높이려는 정책을 관료나 정치권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니 대통령의 말이 구두선(口頭禪)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석·장원재 기자 nex@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