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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여행을 떠납니다, 그대 마음 속으로

입력 | 2013-06-22 03:00:00

◇여행/정호승 지음/128쪽·8000원/창비
등단 40년 정호승 시인, 11번째 시집 출간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로 등단한 뒤, 이듬해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시인 정호승(63). 시로 등단한 것을 작가의 원년으로 본다는 시인은 지난해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시업(詩業)이 40년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썼든 못 썼든 40년 동안 시를 쓸 수 있던 것에 감사했다”는 시인은 한발 한발 걸어온 자신의 시작(詩作)을 스스로 기념하고 싶었단다. 이 시집은 그렇게 나온 등단 40년 기념 자축 시집이자 열한 번째 시집이다.

모두 4부로 나뉜 시집에는 79편의 시가 실렸다. 시집을 열어 1부를 읽고 나니 어떤 이미지가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시인의 아버지에 대한 형상이다.

‘그는 병동 뜰 앞에 버려진 볼펜을 주워 편지를 쓴다/사랑하는 당신에게 오늘도, 라고 쓰고 더 이상 쓰지 못한다’(시 ‘호스피스 병동’에서) ‘오늘은 면도를 더 정성껏 해드려야지…울지는 말아야지/아버지가 실눈을 떠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시면/활짝 웃어야지’(시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에서)

이런 시구도 눈에 밟힌다. ‘당신 떠난 지 언제인데/아직 신발 정리를 못했구나/창 너머 개나리는 또 피는데/당신이 신고 가리라 믿었던 신발만 남아’(시 ‘신발 정리’에서)

먼저 간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의 절절한 마음이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시편들.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 아버님이 돌아가셨나요?’

잠시 멈칫했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님은 살아 계세요. 올해 94세시죠. 지금은 (병원에서) 집으로 모셨어요. 하루하루가 죽음에 닿아있고, 오늘 돌아가시나 내일 돌아가시나 하는 상황입니다. (죽음은) 이제 당연한 얘기가 됐지요.”

이번엔 기자가 멈칫하자 시인은 이렇게 덧붙여줬다. “누구나 그렇지요. 누구나 겪는 일들이죠. 제 아버님도 그렇고 주변에 친구들도 그렇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요. 우리가 지금은 건강하게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떠날 것이고….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허허.”

예순이 넘은 아들은 애써 웃는다. 그 아들은 아침에 집을 나올 때 병석에 있는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고, 저녁에 돌아가서 다시 아버지를 찾는다. 시인의 얘기를 듣고 나니 연과 연, 행과 행의 수많은 골들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듯했다.

많은 문인들이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정호승도 공감하고 표제시를 ‘여행’으로 삼았다. 그는 사유를 좀더 확장한다. “인생은 결국 사람의 마음 속을 여행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마음 속 어떤 부분인가? 결국 사랑이 아닌가 싶어요. (인생은) 서로 다다를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의 오지나 설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지요.”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떠나서 돌아오지 마라/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바람에 흩날릴 때까지’(시 ‘여행’에서)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로 쉽게 스쳐지나가기 쉬운 일상과 사물들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은 작가는 이번 시집에도 그런 소소한 깨달음을 시어에 담았다. 시인의 밝고 촉촉한 시선이 빛난다.

‘쌀이 솥 안에서 기어이 눌어붙어 누룽지가 되는 까닭은/그래도 밥을 굶는 사람이 있을까봐 자신을 눌어붙이는 것이므로’(시 ‘누룽지’에서) ‘너도 그네를 타보면 알 거야/사랑을 위해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시 ‘그네’에서)

시인은 미학적으로 완성도 있는 시를 써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십 년 동안 사랑받을 수 없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스한 애정과 관심이 오늘의 시인 정호승을 있게 만들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시집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