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검 ‘성폭력피해자 무료 지원’ 성과
정연(가명) 씨가 서울남부지검 예술치료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강제추행 당한 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세 차례 예술치료를 받은 뒤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서울남부지검 제공
상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정연 씨를 도운 건 병원이 아니라 검찰청이었다. 1월 서울남부지검 여성아동조사실에 마련된 치료실에서 정연 씨는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받았다. 그는 잔디밭과 건물을 그려 놓고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른 종이를 마구 찢더니 도화지 위에 올려놓았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 거예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정연 씨가 말을 이었다. “저도 이렇게 무너졌어요.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검찰 조사에서 잡아떼는 그 남자에게 살인 충동을 느껴요. 약도 처방 받았지만 소용없었어요.”
직장에 다니던 정연 씨는 편의점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다 지난해 11월 초 바로 옆 편의점 주인 A 씨에게 추행을 당했다. 잔뜩 취해 들어온 A 씨는 물품창고로 정연 씨를 끌고 가 추행하고는 성폭행까지 하려 했다. 어려서 비슷한 일을 당한 경험이 있던 정연 씨는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로 상처가 컸다. ‘이렇게 미치는구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1차 치료시간에 붕괴된 건물로 자신의 무너진 모습을 표현한 정연 씨는 2차, 3차 시간에는 각각 ‘큰 먼지를 빨아들이는 청소기’와 ‘햇살 좋은 오후’를 그리며 나쁜 기억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였다(위쪽 사진부터). 서울남부지검 제공
일주일 뒤 정연 씨의 표정은 달라졌다. “잠을 잘 잤어요.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일을 털어놓으니 후련했나 봐요. 빨간 버튼 덕분에 많이 안정됐는데, 이제 사용 횟수도 줄었어요.” 사건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감정을 그려 보라는 주문에 정연 씨는 먼저 지렁이와 달걀을 그렸다. 밟히고 깨지기 쉬운 자신을 뜻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청소기를 그렸다. 나쁜 기억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그렇게 표현했다.
마지막 치료 시간, 정연 씨는 햇살 아래 핀 꽃을 그렸다. 가해자의 재판에 참석할 거라며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무조건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적절한 벌을 받으면 될 것 같아요. 어렸을 때와 달리 이번에 저는 현명하게 잘 대처했어요. 대견합니다.” 정연 씨는 사건 이후 잠시 쉬었던 직장에도 복귀했다.
대검찰청은 지난해 5월부터 한국표현예술심리치료협회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성폭력 및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표현예술·심리치료(예술치료)’를 실시하고 있다. 가해자를 기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자의 상처도 치유해 주기 위해서다. 사건을 수사하면서 담당 검사가 피해자의 심리상태가 심각하다는 판단이 들면 예술치료를 받게 한다. 그러면 피해자는 검찰청에서 3∼30차례 예술치료사에게 무료로 치료를 받는다. 검사는 예술치료의 진행 과정을 살피고 피해자를 멘토링해 준다.
지금까지 예술치료를 받은 성폭력 피해자는 20여 명. 대검찰청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자가 후유증을 극복하고 범죄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올해 지원 대상을 두세 배까지로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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