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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다한 실패엔 특진… 無자원 ‘산유국의 꿈’ 그렇게 컸다

입력 | 2013-04-23 03:00:00

■ 민간기업 해외자원개발 30년… 한국 석유-가스 자주개발률 13.7%로




한국의 지구 반대편 나라인 남아메리카 페루의 팜파 멜초리타 액화천연가스(LNG) 공장. 연간 생산량이 440만 t에 달하는 이 공장은 인근 카미시아 88광구와 파고레니 56광구의 천연가스를 액화시켜 주변국에 판매한다. SK이노베이션은 두 천연가스전의 지분을 17.6%씩 보유하고 있으며 LNG 공장 지분도 20% 갖고 있다. 석유 환산량 기준으로 하루 4만5000배럴의 천연가스와 1만2000t의 LNG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아예 해외광구를 운영하는 국내 기업도 많다. 대우인터내셔널은 2000년과 2004년 각각 미얀마의 A-1, A-3 해상광구 지분 51%씩을 인수하면서 개발권을 획득했다. 이 회사는 두 해상광구에 2009∼2012년 11억 달러(약 1조2000억 원)를 투자했다. 이 광구들은 다음 달부터 상업생산이 시작된다.

한국 민간기업이 해외 자원개발 투자에 나선 지 30년이 됐다.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인 유공이 1983년 4월 인도네시아 카리문 광구에 지분 5%를 투자한 것이 우리나라 민간기업 자원개발의 시초였다. 이후 잇따라 해외 자원개발에 나선 민간기업들은 2011년 말까지 석유·가스 부문에 17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1981년 해외 자원개발을 시작한 한국석유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공기업은 2011년까지 249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 결과 석유가 단 한 방울도 나지 않는 한국의 석유·가스 자주개발률(전체 석유·가스 사용량 대비 자원 확보 비율)은 2011년 기준 13.7%에 이른다.

○ “실패를 문책하지 말라”

정철길 SK C&C 사장은 과장 시절이던 1990년경 미얀마에서 석유개발업무를 맡았다. 해외에서, 그것도 성공 여부가 지극히 불투명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천만 달러가 투입된 미얀마 프로젝트는 결국 실패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귀국하는 팀원들은 ‘패잔병’의 멍에를 스스로 뒤집어썼다. 그러나 정 사장은 한국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그는 훗날 한 저서에서 “단일 프로젝트로 엄청난 규모였던 미얀마 프로젝트는 후에 실패했지만 귀국 후 나는 오히려 특진을 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했고, 고생하고 돌아왔다는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정 사장의 이런 기억은 민간기업의 해외 자원개발 추진과정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1983년 유공의 첫 시도였던 카리문 광구 투자는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 투자는 이듬해 2월 북예멘의 마리브 유전개발 사업이었다. ‘천운’이 따랐는지 그해 7월 마리브 광구에서 원유가 발견됐다. 회사 분위기는 최고조에 올랐지만,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성공’보다 ‘실패’를 먼저 거론했다. 그는 1984년 12월 석유개발사업에 대한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실패했다고 석유개발사업에 참여한 사람을 문책하지 말라” “석유개발과 관련이 없는 부서에서는 ‘실패’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라”고 주문했다. 작은 성공에 취하기보다는 큰 실패를 맛보더라도 극복할 수 있어야 수십 년 후 큰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의미였다.

SK이노베이션은 현재 6개국 8개 광구에서 석유 및 천연가스를 하루 6만2000배럴씩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이 부문에서 1조 원 가까운 매출액과 5300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 무역회사의 무한 변신

현재 한국의 해외 자원개발 사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한 축은 ‘상사’들이다. 해외 무역을 기반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여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불린 상사들은 2000년대 들어 해외 자원개발 사업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LG상사의 해외 자원개발 역사는 유공과 비슷한 시기인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사는 1983년 호주 엔셤 유연탄광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경험은 무역회사의 존재가치가 점차 희석돼 가던 1990년대 들어 직접 유전이나 가스전에 투자하기로 결정하는 데 큰 자산이 됐다. LG상사 관계자는 “현재 해외 자원개발 프로젝트는 30여 개”라며 “이 중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의 광구에서 향후 1, 2년 내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간다는 목표”라고 말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미얀마 가스전의 상업생산을 계기로 트레이딩 부문 중심에서 자원개발 중심으로 영업이익 구조가 완벽히 전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동희 대우인터내셔널 부회장은 지난달 한 간담회에서 “미얀마 A-1, A-3 광구에서 정상 생산이 이뤄진다면 한 해 5억 달러 매출액에 3억 달러 순이익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다소 진출이 늦은 삼성물산도 한국석유공사와 함께 투자하는 방식으로 미국 자원개발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2008년 미국 멕시코 만에 위치한 앵커광구에 투자(한국석유공사 80%, 삼성물산 20%)했고, 2011년에는 미국 내에 8개 유전과 2개 가스전을 보유한 패럴렐패트롤리엄사를 인수(삼성물산 51%, 한국석유공사 10%, 유전 펀드 39%)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