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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없는 ‘성접대 리스트’ 유포… “너무 억울해 자살 생각”

입력 | 2013-04-02 03:00:00

■ 사이버 공간 도 넘은 유언비어




건설업자의 전현직 고위관료 성접대 사건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전혀 확인되지 않는 ‘성접대 리스트’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무분별하게 유포되고 있다. 거론된 사람의 명예와 가정을 파괴할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이런 리스트가 실명으로 나돎에 따라 해당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 탤런트 박시후 씨(본명 박평호·36)의 성폭행 의혹 사건을 놓고도 엉뚱한 인물이 고소한 여성으로 지목되면서 수난을 겪고 있다. 확인되지 않은 출처 불명의 엉터리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유포하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지만 정부당국은 방관하고 있다.

○ “자살부터 생각났다”

엉터리 ‘성접대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이철규 전 경기지방경찰청장은 1일 이를 유포한 트위터 사용자 55명을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그는 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건설업자 윤모 씨와 아무런 친분이 없고 문제의 별장에 간 적도 없는데 헛소문이 돌아 정신적 충격이 너무 크다”며 “인터넷 성접대 리스트에 내 이름이 뜨니 내 자식들부터 그걸 보고 난리가 났다. 자살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이 전 청장은 이어 “내 딸이 시댁에 가서 얼굴을 들 수가 없고 딸의 직장 동료들까지 내 안부를 묻는다고 하니 아버지로서 심정이 어떻겠느냐”며 “30년간 몸담았던 경찰과 내 고향에서 나를 믿었던 동료와 후배들이 느낄 실망감과 배신감이 어떨지 생각하면 잠을 못 이룬다”고 털어놨다.

이 전 청장은 고소하면 이름이 더 알려질 수 있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쳤다. “혼자만 억울해하고 넘어가면 유언비어로 사람을 죽이는 악습이 계속된다”는 이유였다.

지난달 21일 자신의 트위터에 “만일 성접대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할복자살 하겠다”는 글을 올린 허준영 전 경찰청장도 이날 취재팀과 통화에서 “SNS에 별별 음해성 이야기들이 방치되고 있어 내가 단호하게 이야기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내 이름만 더 많이 공개돼 나만 피해보는 결과가 되지 않았냐”고 한탄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검찰 고위간부도 부인과 두 딸 등 가족이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를 온라인에서 성접대 대상으로 낙인찍은 이들은 ‘윤 씨가 조폭으로 활동했던 지역과 고향이 같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본보 확인 결과 윤 씨가 조폭으로 활동한 정황은 없으며, 인터넷에서 지목한 지역도 윤 씨와는 무관하다. 이 간부의 지인은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도 가정을 파괴 위기로 몰아넣은 책임은 누가 지겠느냐”며 한탄했다.

○ 헤비 유저와 포털 검색이 키우는 유언비어

2월 연예인 지망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배우 박시후 씨 사건에서도 실제 고소인이 아닌 다른 여성이 성폭행 피해 고소인으로 지목돼 신상이 공개됐다. 인터넷과 SNS을 통해 “○○ 언론사 사회부 기자에게 들었다”며 이 여성의 본명과 사진, 출신 학교가 급속히 확산됐다. 이 여성은 1일 취재팀과 통화에서 “어떤 언급도 하고 싶지 않다. (내 고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런 사건을 예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 여성 외에도 최근 각종 블로그나 카페 등에는 ‘박시후의 그녀’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여성들의 신상도 공개됐다. 최근에는 ‘박시후 A 양 동영상’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카카오톡 등 SNS를 통해 유포되고 있다. 상반신을 벗은 채 선정적인 동작을 하고 있는 이 영상 속 여성은 박 씨 고소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로 확인됐다.

이런 유언비어와 ‘엉터리 콘텐츠’의 유통은 보안 및 인권보호 의식이 허술한 수사당국과 정치권 인사들에 의해 단초가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수사관계자나 보고라인에 있는 인사들이 상급기관이나 정치권에 흘려준 내용이 과장되고 윤색된 채 시중에 흘러나오는 것이다. 악의적인 의도를 갖고 있는 누리꾼들이 그럴듯하게 내용을 만들어 유포시키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언비어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다수의 팔로어나 친구를 확보한 ‘헤비 유저(Heavy User)’의 손을 거치며 확산된다. 이를 본 사람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포털 사이트 등에 관련 사실을 검색하면 검색량이 늘어나 ‘자동완성’ ‘연관검색어’ 등에 등록이 되고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도 오르면서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SNS와 인터넷을 통해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크게 인정심리, 관음증, 사회적 불신 등 세 가지로 분석했다. 인정심리란 인터넷을 통해 남들이 궁금해할 만한 사실을 혼자 알고 있다는 점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말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불확실한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건 ‘너는 몰랐지만 난 알고 있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을수록 대중은 더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을 갖게 되고 여기에 일부 인터넷에서 눈길을 끌기 위해 선정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기존 언론에 대한 불신을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정보가 은밀하게 유통되는 사회는 언론 등 공식 미디어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소문과 유언비어는 공식 채널에 대한 불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빠르고 넓게 퍼진다는 것. 결국 언론이나 정부기관이 뭔가 감추고 있을 거라는 대중적 합의가 있으면 음모론 같은 유언비어가 어렵지 않게 진실로 여겨진다는 설명이다. ‘검찰에서 그러던데…’라는 단서를 단 유언비어가 유통되는 배경이다. 수사기관과 언론이 도덕성과 신뢰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이 같은 유언비어는 사라지지 않을 위험성이 크다.

○ 단호한 처벌로 악순환 고리 끊어야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은 남의 글을 퍼 나르거나 유포하는 행위를 일일이 감시할 수 없어 처벌이 쉽지 않다고 설명한다. 명예훼손은 피해자가 신고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가 아니므로 고소나 고발이 없어도 검찰이 기소할 수 있다. 하지만 워낙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다 보니 주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 수 있는 사안이나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해 처벌할 뿐이다. 경찰 관계자는 “유언비어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이나 모욕 사건은 피의자가 해당 아이디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일일이 법원에서 영장을 받아 수사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검찰과 경찰이 수사가 어렵다는 현실론에 안주하지 말고 강력한 의지를 갖고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유언비어나 남의 사적인 정보를 인터넷에 퍼뜨리는 행위는 당한 사람의 인격과 삶, 가정마저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사법당국이 흉악범죄 근절에 준하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사당국이 “수사가 어렵다” “피해자의 고소가 있으면 수사하겠다”는 소극적 태도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수사 인력과 시간을 투입해 유언비어 유포 행위를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남궁기 연세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허위사실 유포가 피해자에게 상상 이상의 큰 트라우마를 주는 범죄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며 “이번 성접대 리스트 유포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해 엄격하게 처벌해야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흐지부지돼 버리면 유언비어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죄의식이 희미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희창·주애진·김성모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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