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곡이 되레 농민 피폐 부추겨” 무분별 구제정책 비판
성호 이익은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릴 때에만 국가가 곡식을 빌려주고, 평소에는 각 가정이 스스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도록 일정량의 토지를 소유하는 복지정책을 제안했다. 그림은 김홍도의 풍속화 ‘타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큰 흉년 들 때만 백성 도와야”
무상급식과 반값등록금으로 대표되는 ‘보편적 복지’냐, 저소득층의 기초생활보장에 초점을 둔 ‘선별적 복지’냐의 문제는 지난 대통령선거 전부터 뜨거운 논쟁으로 이어져 왔다. 성호가 살던 시기의 복지정책은 같은 시기 서양이나 중국에 비해 앞서 있었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조선의 복지를 지탱하는 두 축은 국가가 흉년에 곡식을 빌려주는 진휼(賑恤)책과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는 혜휼(惠恤)책이었다. 국가가 백성에게 환곡(還穀)을 꾸어주고 시간이 흘러 갚지 못하면 탕감해주자 국가에만 의지하려다 낭패를 보는 농민들이 생겨났다.
광고 로드중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성호는 각 가정이 계획과 자조(自助)정신에 입각해 스스로 살아가도록 유도하고, 큰 흉년이 들어 불가피할 때만 지원하자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성호는 백성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면서도 자조정신을 키울 수 있는 정책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한전론’이다. 농민들이 스스로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도록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정해 놓고 그 이상만 매매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인데 실제 도입되진 못했다.
○ “당파와 학파 달라도 배울 점은 배워야”
21세기 뉴미디어의 발달로 소통의 수단은 다양화됐지만 이념과 정파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불통(不通)은 여전히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폐단이다. 성호는 한마디로 ‘소통의 달인’이었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성호는 경기 안산에서 학문을 했지만 당시 영남 지역의 고집스럽고 꼿꼿한 퇴계학파 인사들과도 원활히 소통했다”고 말했다. 남인 계열인 성호는 북인 계열에다 자신과 학문적 견해도 달랐던 이식(1659∼1729)의 경기 이천 집에 두 차례 찾아가 토론을 벌였다. 성호의 조카이자 수제자인 이병휴에 따르면 성호는 학자로서 모범적 자세를 견지했던 이식의 장점을 여러 차례 칭찬했다고 한다.
광고 로드중
21세기의 격변하는 세계정세에 발맞춰 유연한 혁신이 요구되는 가운데 이를 몸소 보여주는 역사 속 인물이 성호라는 의견도 있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은 “성호는 당시로선 선구적으로 세계사의 조류에 맞춰 변화하고 적응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말했다.
<글 실린 순서>
1회 : 인간 성호의 생애
2회 : 성호의 실학사상
3회 : 성호학 출현의 배경
4회 : 성호학파의 확산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