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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지식인’ 성호 이익 서거 250주년] 21세기에도 살아있는 성호

입력 | 2013-03-25 03:00:00

“환곡이 되레 농민 피폐 부추겨” 무분별 구제정책 비판




성호 이익은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릴 때에만 국가가 곡식을 빌려주고, 평소에는 각 가정이 스스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도록 일정량의 토지를 소유하는 복지정책을 제안했다. 그림은 김홍도의 풍속화 ‘타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성호 이익(1681∼1763)이 살던 시기는 지금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조선의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국가 전체의 부는 늘어났지만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빈부 격차가 심화됐다. 당쟁이 격화되고 관료의 부정부패도 확산돼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 토대를 두고 국가 경영의 틀을 새로 짜야 하는 시점에 나타난 인물이 바로 실학의 선구자 성호였다. 성호가 내놓은 창의적 개혁론과 ‘열린 지식인’으로서의 자세는 그가 서거한 지 25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탁월한 시사점을 준다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 “큰 흉년 들 때만 백성 도와야”

무상급식과 반값등록금으로 대표되는 ‘보편적 복지’냐, 저소득층의 기초생활보장에 초점을 둔 ‘선별적 복지’냐의 문제는 지난 대통령선거 전부터 뜨거운 논쟁으로 이어져 왔다. 성호가 살던 시기의 복지정책은 같은 시기 서양이나 중국에 비해 앞서 있었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조선의 복지를 지탱하는 두 축은 국가가 흉년에 곡식을 빌려주는 진휼(賑恤)책과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는 혜휼(惠恤)책이었다. 국가가 백성에게 환곡(還穀)을 꾸어주고 시간이 흘러 갚지 못하면 탕감해주자 국가에만 의지하려다 낭패를 보는 농민들이 생겨났다.

이런 현실에 주목한 성호는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가 직접 본 바로도 시골에 ‘패망’한 집의 8∼9할은 환곡과 사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차라리 구제하는 방법을 그만두고 민이 임의로 제 살길을 찾도록 맡겨 둔다면 반드시 모두 굶어죽지 않을 것이고, 살아남은 자는 제 집을 보전할 수 있어 인정이 안정될 것이다. 큰 흉년이 들어 민이 굶주리게 될 때에만 창고에서 곡식을 내어 진휼할 따름이다.”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성호는 각 가정이 계획과 자조(自助)정신에 입각해 스스로 살아가도록 유도하고, 큰 흉년이 들어 불가피할 때만 지원하자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성호는 백성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면서도 자조정신을 키울 수 있는 정책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한전론’이다. 농민들이 스스로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도록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정해 놓고 그 이상만 매매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인데 실제 도입되진 못했다.

○ “당파와 학파 달라도 배울 점은 배워야”

21세기 뉴미디어의 발달로 소통의 수단은 다양화됐지만 이념과 정파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불통(不通)은 여전히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폐단이다. 성호는 한마디로 ‘소통의 달인’이었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성호는 경기 안산에서 학문을 했지만 당시 영남 지역의 고집스럽고 꼿꼿한 퇴계학파 인사들과도 원활히 소통했다”고 말했다. 남인 계열인 성호는 북인 계열에다 자신과 학문적 견해도 달랐던 이식(1659∼1729)의 경기 이천 집에 두 차례 찾아가 토론을 벌였다. 성호의 조카이자 수제자인 이병휴에 따르면 성호는 학자로서 모범적 자세를 견지했던 이식의 장점을 여러 차례 칭찬했다고 한다.

최근 새 정부를 이끌 고위직 인사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밀실 인사’ ‘나눠 먹기식 인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성호는 영조가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탕평책을 비판하고 능력 위주의 인사를 강조했다.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는 “탕평책은 임금의 입장에서 정치적 이해타산을 조절하는 수단일 뿐 당정의 폐단을 막기보다 오히려 능력 있는 인재의 등용을 가로막아 국가를 망하게 한다는 게 성호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21세기의 격변하는 세계정세에 발맞춰 유연한 혁신이 요구되는 가운데 이를 몸소 보여주는 역사 속 인물이 성호라는 의견도 있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은 “성호는 당시로선 선구적으로 세계사의 조류에 맞춰 변화하고 적응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말했다.

<글 실린 순서>

1회 : 인간 성호의 생애
2회 : 성호의 실학사상
3회 : 성호학 출현의 배경
4회 : 성호학파의 확산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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