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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베틀에서 배틀하자” 디즈니풍 박씨부인

입력 | 2013-02-26 03:00:00

창작뮤지컬 ‘날아라, 박씨’ ★★★☆




한국의 고전소설 ‘박씨부인전’을 뮤지컬화하는 극중극 형식의 창작 뮤지컬 ‘날아라, 박씨’에서 프리뷰 공연을 마친 뒤 ‘시파티’(공연 시작을 기념하는 회식)에서 박씨 부인 역으로 더블 캐스팅된 두 여배우가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다 성대에 이상이 생기는 순간. 이로 인해 여주인공 오여주가 정식 개막공연에서 박씨 부인 역으로 긴급 투입된다. 쇼앤라이프 제공

뮤지컬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긴 뮤지컬, 현재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새로운 창작뮤지컬이 등장했다. 극작가 정준과 작곡가 조한나, 신인 여성뮤지컬 콤비가 4년간 공들여 다듬은 끝에 대학로 공연장에 올라간 ‘날아라, 박씨’(권호성 연출)다.

이 뮤지컬은 우리의 전통소설 ‘박씨부인전’을 소재로 택했다. 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솜씨는 다양한 미국 뮤지컬을 두루 섭렵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우선 박씨부인전 이야기와 이를 뮤지컬로 제작하는 제작진의 백 스테이지 이야기를 극중극 형식으로 전개한 점은 ‘키스 미 케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키스 미 케이트’는 남존여비 사상이 뚜렷한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그 반대에 가까운 남녀 배우의 실제 사랑이야기를 병치한다. 고전과 현실의 간극에서 웃음을 끌어내는 한편으로 고전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음미하는 묘미를 보여준다.

극 중 뮤지컬이 전통적 이야기를 살짝 뒤집는 점은 디즈니 뮤지컬들을 떠올리게 한다. 원래 박씨 부인은 천하박색의 외모로 첫날밤부터 소박맞았다가 감춰진 재주로 남편의 사랑을 얻고 원래의 아름다운 외모를 되찾으며 병란에 휩싸인 나라까지 구해 정경부인이 된다. 극 중 뮤지컬은 박씨 부인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꾸려가는 것으로 바꾼다. 이는 극 초반 제작회의 때 이미 암시된다. 스토리 라인을 처음 들은 음악감독(김남호)의 “난 그냥 이 얘기가 싫어요. 못생긴 주인공도 싫고, 괜히 슈렉이나 헤어스프레이 따라 하는 것 같고. 칙칙하잖아”라는 자기풍자를 통해서다.

디즈니풍의 만화적 상상력은 이 뮤지컬 도처에서 발견된다. 박씨를 남몰래 돕는 박각시나방 애벌레(정동석)가 유창한 영어를 섞어가며 자신을 에인절(angel)이라고 소개한 뒤 성이 한자로 어떻게 되느냐는 박씨 부인의 질문에 “사랑 애(愛)”라고 답한다. 또 청나라에서 파견한 미모의 자객이 박씨 부인과 맞대결을 벌일 때 “간만에, 배틀(battle·맞대결을 지칭하는 게임용어)이다”라고 외치면 ‘베틀’ 위에 올라선 두 여인이 도술대결을 펼친다. ‘드림걸스’와 ‘지킬 앤 하이드’의 유명 장면을 슬쩍 끌어들인 장면도 코믹하다.

이 뮤지컬의 진짜 재미는 한국 뮤지컬업계의 속살을 가감 없이 보여준 백 스테이지 스토리에 있다. 한때 가수를 꿈꾸다 뮤지컬 제작사의 컴퍼니 매니저로 일하는 여주인공 오여주(홍륜희·엄태리)의 회상으로 진행되는 그 이야기에는 공연계 속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이라면 포복절도할 풍경이 잔뜩 녹아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업계 뒷이야기를 다룬 ‘프로듀서스’를 연상시키지만 그 내용은 지극히 한국적이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들먹이며 잘난 척하는 연출가, 그 연출가가 유일하게 꼬리를 내리는 기자, 서로 뮤지컬을 모른다며 씹어대는 극작가와 작곡가, 주연 여배우들의 치열한 신경전, 외모는 잘생겼지만 발성은 엉망인 연예인 출신 남자 배우…. 여자 스태프들이 모여 “저 배우 멋있다 빠져들면 절대 안 돼. 얼굴에 분칠한 남자는 안 돼.”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척을 잘해야 한다” 같은 대화를 노래로 담은 ‘이 바닥 철칙’도 일품이다.

하지만 소극장 뮤지컬로 보기엔 덩치가 너무 크다. 13명이나 되는 출연진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무대효과를 제대로 살리려면 ‘빨래’처럼 중극장용 뮤지컬로의 변신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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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까지 서울 대학로 PMC대학로자유극장. 5만 원. 02-743-6487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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