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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메트로 像像]“안 취하면 집에 못가네” 술 권하는 정조

입력 | 2013-02-12 03:00:00

수원 팔달문시장에 자리… 지친 백성 마음 술로 달래줘




“이리 와서 한잔하고 가게.”

경기 수원시 팔달문시장 고객지원센터 앞.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서 오라’며 반갑게 술을 권하는 이가 있다. 한 평(3.3m²) 남짓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있다. 술상에는 안주 하나, 술잔 두 개가 고작이다.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다정하게 술 한잔 따라주는 모습이 친근하기까지 하다. 주인공은 수원 화성을 축성한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의 조형물(사진). 근엄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백성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겠다는 인간 정조의 모습을 표현했다.

실제 정조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고 셌다고 한다. 특히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탁주를 좋아했다. 주안상에는 기름진 고기 안주는 하나도 없었고 소박한 푸성귀 안주가 전부였다. 밤새 술을 마셔도 몸가짐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고 젊은 신하들조차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종에게 업혀 궐문을 나서기가 일쑤였다. 수원 화성을 축성한 정약용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해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술에 취한 상태로도 어떻게든 몸가짐을 바로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재미있어 했다고 한다.

조형물 아래 좌대에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정조의 그런 모습을 표현한 글귀가 있다. ‘취하지 않으면 못 돌아간다’는 뜻의 ‘불취무귀(不醉無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뒤에도, 그리고 수원 화성 축성 당시 기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도 늘 첫마디로 했던 말이다.

정조는 이 글을 통해 “백성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술에 마음껏 취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주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또 그런 사회를 만들어주지 못한 군왕으로서의 자책감과 미안함을 토로한 글귀이기도 하다.

왕은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한양과 가까운 수원 팔달문 인근에 시장을 열게 했다. 그의 뜻을 받든 전국의 선비들이 하나둘 수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허례허식을 벗어던지고 직접 상업에 뛰어들었다. 지금의 팔달문시장을 있게 한 주인공이 바로 정조였던 셈이다. 상인들은 오늘날 팔달문축제 등을 통해 정조의 애민사상을 기리고 있다. 이 조형물도 상인들의 마음을 담아 2011년 12월에 세워졌다.

조영달 기자 dalsar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