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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드림/서비스 가시 뽑아야 일자리 새살 돋는다]의료계 만성질환 ‘임의비급여’ 규제

입력 | 2013-02-04 03:00:00

노인병원 심리치료 족쇄 풀면 5000여명 취업 길 열리는데…




“요즘 환자들은 병원에서 치료만 바라는 게 아니에요. 음악 미술 요리 같은 취미생활을 원하고, 요가처럼 건강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배우고 싶어 하죠. 발 마사지 같은 서비스 한 번에 환자들이 얼마나 감동하는데요. 그런데도 병원이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고 비용을 청구하면 바로 ‘불법’이 된다는 게 답답한 노릇이죠.”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성북참노인전문병원 김선태 원장은 1일 이렇게 푸념했다. 환자들이 요구하는 의료서비스의 질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법규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현행 건강보험체계에서는 정해진 진료비 외의 비용을 병원이 환자에게 청구하면 ‘임의 비급여’로 간주돼 처벌 대상이 된다. 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 제19조는 ‘병원은 정부에서 정하는 급여나 비급여 외의 다른 명목으로 비용을 청구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임의 비급여는 ‘불가피하고, 의학적으로 타당하고, 환자가 동의한다’라는 극히 제한적인 조건에 부합할 때만 인정된다. 핵심 진료 행위를 제외하면 환자에게 심리적,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어떤 서비스도 환자에게서 별도의 돈을 받을 수 없는 것.

이런 점 때문에 성북참노인전문병원은 병원 자체 비용을 대거나 자원봉사자 등을 활용해 각종 편의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김 원장은 “추가 지출에 대한 부담 때문에 대부분의 병원은 환자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어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 요양병원 1000곳이 음악-미술-요가 치료사 1명씩만 뽑아도… ▼

1월 30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성북참노인전문병원에서 환자들이 강사의 지도에 따라 필라테스를 배우고 있다. 환자들은 필라테스를 통해 질병으로 인한 통증이나 피로를 완화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노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요양병원은 전국에 1000여 개. 김 원장은 병원 한 곳에 환자들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인력이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5, 6명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임의 비급여 규정만 유연하게 바꿔도 노인전문병원에서만 2000∼5000여 명의 새로운 병원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지난달 30일 성북참노인전문병원의 암요양센터에서는 환자 대여섯 명이 강사의 지도에 따라 필라테스(요가의 한 형태)를 배우고 있었다. 머리를 바짝 깎은 암 환자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이들은 팔을 양옆으로 쭉 뻗고 상체가 땅에 닿도록 몸을 구부리는 등 강사의 다양한 동작을 따라하며 즐거워했다.

암, 뇌중풍, 파킨슨병, 치매 등을 앓는 노인 환자들은 이 병원에 머물면서 매주 필라테스, 요가 등을 배운다. 발 마사지를 받으며 통증을 완화하고 피로를 해소하기도 한다. 공식적인 진료 외에 환자들이 병원에서 받는 서비스는 10가지가 넘는다.

환자들은 얼마 전에는 ‘탁구공 옮기기’ 게임을 했다. 노인들이 일렬로 앉아 숟가락을 이용해 옆 사람에게 공을 옮기는 게임. 빨리 옮기는 팀이 이긴다. 최근 ‘미술치료’ 시간에는 환자들이 각자의 고향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고 완성한 뒤에 고향에 대한 추억을 서로 나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법으로 정해진 진료 행위가 아니지만 중증 치매 환자들의 집중력을 높이고 기억력을 되살리는 효과가 있다.

김선태 원장은 “단지 환자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게 아니고 치료에 실제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라면서 “그런데도 한국의 병원은 획일적인 수가(酬價) 제도에 발이 묶여 좋은 의도로 서비스를 제공해도 기본적인 인건비조차 받지 못하게 돼 있다”라고 말했다.

정식 직원 170여 명인 이 병원의 병상은 235개. 수백 명의 환자에게 병원 돈을 들여 무료 서비스를 하려다 보니 김 원장은 병원 재정이 걱정됐다. 결국 이 병원은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에 따라 인근 교회와 학교에서 매달 60∼70명의 자원봉사자가 ‘재능 기부’ 형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할 수 없는 일부 서비스는 강사를 초빙해 해결한다. 강사료는 시간당 3만원 남짓. 병원이 전적으로 비용을 지불한다.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교통비도 병원 몫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환자들에게 다양한 부가서비스를 해 주는 병원은 극소수에 그친다. 김 원장은 “일반 병원은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인건비를 마련하기가 어렵다”라며 “진료수가 자체가 낮은 상태에서, 의료 외의 편의 서비스를 위해 병원이 추가 지출을 하면 경영 상태가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술치유센터’를 운영하는 관동대 의대 명지병원도 마찬가지 사례다. 이곳에는 암 환자와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소아 환자들, 각종 수술 환자들이 월 120명 정도 방문해 병원 측이 제공하는 음악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현행법 규정상 정신과 환자가 아니면 음악치료는 진료 수가에 반영되지 않고, 환자들에게 비용을 청구할 수도 없게 돼 있다. 명지병원 관계자는 “예술치유센터에서는 병원 직원 2명과 외부 전문가 8명이 매주 환자들을 대상으로 음악치료를 해 준다”라며 “법규에 따라 필요한 인건비는 모두 병원이 자체 부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임의 비급여 규제는 의료기관이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치료를 봉쇄하고 환자의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의료계에서 논란이 돼 왔다. 일부 병원이 환자가 원할 경우 국내에서 허가받지 않은 약이나 치료를 제공하고 그 비용을 환자에게 청구하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었다.

이 문제가 정부와 의료기관 간 법적 공방으로 비화된 사례도 있다. ‘백혈병 환자들에게 임의 비급여를 통해 진료비를 부당하게 징수했다’라는 이유로 과징금을 부과 받은 여의도 성모병원이 보건복지부 장관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지난해 6월 대법원은 병원 측 손을 들어줬다. 비록 ‘비급여’ 진료 행위라도 의학적 필요성이 인정되면 제한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다. 성북참노인전문병원의 경우처럼 의학적으로 시급한 상태가 아닌 환자에게 제공한 부대 서비스는 여전히 비용 청구가 엄격히 금지돼 있다.

정부가 이 규제를 풀지 않고 있는 주된 이유는 자칫 의사의 자의적인 진료 행위가 확산돼 ‘건강보험 체계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진료 외의 각종 편의 서비스를 병원이 환자에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하면 환자의 의료비 부담이 급증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병원이 규정을 남용해 꼭 필요하지 않은 치료까지 환자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에게 의료 서비스에 대한 선택권을 주는 차원에서 비급여 항목에 대한 규제 완화를 점진적으로라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에 힘을 얻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의사와 간호사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을 전공한 다양한 전문 인력이 병원에서 일하게 돼 의료산업 일자리 창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효과가 기대된다.

김 원장은 “병원은 환자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환자는 비용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라며 “환자에게 제공하는 편의 서비스를 진료수가에 반영해 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환자에게서 이런 비용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줘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특별취재팀

▼팀장

박중현 경제부 차장

▼팀원

유재동 문병기 박재명 김철중 (경제부)

김희균 이샘물(교육복지부)

염희진(산업부) 김동욱 기자(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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