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 정치부 기자
첫째, 사면에 대한 이 대통령의 말이 바뀌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8년 8·15특사를 단행하면서 “임기 중 발생하는 비리는 단호히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4년 반 뒤 “임기 중 비리”란 언급은 “임기 중 권력형 비리”로 슬쩍 바뀌었다. ‘사면 불가 대상자’를 줄이기 위한 장치겠지만 이 경우 ‘권력형 비리’에 대한 정의가 궁금해진다. 가령 사면된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은 현 정권 출범 뒤인 2010년 8월까지 기업체에서 수십억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현직 대통령의 최측근’이란 배경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천 회장 사례가 권력형 비리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권력형 비리란 것일까.
둘째, ‘재임 중’이란 용어도 혼란스럽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 김효재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 연루된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은 2008년 7월 발생했다. 분명히 이 대통령 임기 내 벌어진 사건이다. 친이(친이명박)계인 장광근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도 현 정부 임기 중인 2010년 8월까지 불법 후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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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규정도 무력화됐다. 형기의 3분의 2를 채워야 사면 대상자가 되는 것과는 달리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천 회장은 고작 31%(징역 2년 6개월 확정), 47%(징역 2년 확정)만 각각 채우고 수감 생활에서 벗어났다.
다섯째, 기준도 찾아보기 어렵다. 장 전 사무총장과 김희선 전 열린우리당 의원은 지역구(서울 동대문갑)가 같고, 비슷한 시기에 기소됐지만 장 전 총장만 사면됐다. 3년 뒤 총선에서 장 전 의원은 출마할 수 있지만 김 전 의원은 새 정부가 사면하지 않을 경우 발이 묶인다. ‘친이=사면, 다른 당=배제’가 기준이라면 기준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 대통령을 통해 무엇이 법과 원칙인지를 분명하게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 대통령이 법과 원칙을 들이대며 사면을 강행한 날, 박 당선인이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울 적임자”라고 설명하며 지명한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가 여러 위법 시비로 낙마하면서 박 당선인이 강조해온 법과 원칙은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 더구나 ‘작은 청와대’ 구상은 이미 ‘큰 청와대’로 선회했고, “경호처는 손을 대지 않는다”(유민봉 인수위 국정기획분과 간사)던 공언은 장관급 경호실장 신설로 빈말(空言·공언)이 된 터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신뢰를 주지 못한다. 법과 원칙도 설 수가 없다.
조수진 정치부 기자 jin06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