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83개 사찰 담은 화첩 ‘가람진경’ ‘지리산진경’ 펴내
16일 오전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이호신 화백은 마침 올해 첫 작품 ‘진송(辰松·별과 소나무)’을 인근에 맡겨뒀다고 손을 잡아끌었다. 작품 앞에 선 이 화백은 1월 1일 0시에 목욕재계를 한 뒤 하루 꼬박 쉬지 않고 그렸다며 “이걸 처음으로 동아일보에 공개하는 연이 닿았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16일 오전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한국화가 이호신 씨(56)는 달변 속에도 말끝마다 ‘인연’을 되뇌었다. 짧은 서울 일정을 마치고 경남 산청의 자택으로 향하던 그를 붙잡아 앉혔으니 행운이야 기자에게 따른 셈. 하지만 덜렁 단출한 가방 하나 멘 이 화백은 자신이 걸친 잿빛 개량한복을 가리키며 “운이 아니라 연”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 옷도 우연히 친분 쌓은 지인이 선물한 거요. 뭔가 이뤄지려면 꼭 인연이 작용한다니까. 이번에 낸 화첩도 연이 끊기면 안 되는 거거든. 창고가 불타 500질 겨우 남긴 것도 안타깝지만 그 탓이에요. 절도 백날 가야 소용없어. 기운과 닿아야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건 사람 맘대로 되는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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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보기 나름입니다. 그래도 낙산사가 세상 뜨기 전, 붓을 들도록 기회를 줬으니 얼마나 고마워요. 용유담도 요새 말 많던데, 혹시 압니까. 그림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돼 아름다운 자연문화재를 지키는 데 일조할지…. 연은 좋고 나쁨이 없거든. 사람이 문제지.”
한국화가 이호신 씨의 ‘가람진경’ 첫머리에 실린 강원 양양 낙산사. 2005년 산불에 타 사라져 버린 가람의 옛 전경이 뭉클함을 전한다. 산스튜디오 제공
“사의란 게 뭐냐. 그림을 그리는 뼈대입니다. ‘뜻을 그린다’ 정도로 풀면 되겠네요. 인물이나 풍경을 그냥 화폭에 옮겨놓는 건 화가가 아니죠? 예를 들어 사찰 문화재를 그릴 땐 창건한 이의 마음이나 절을 감싼 자연의 속내를 짚어야 해요. 실상사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근데 2010년인가…, 입구 돌장승이 딱 말을 건네는 거예요. ‘이젠 밥값 해야지’라고. 그러곤 한달음에 풀었지, 거참.”
130여 점에 전국 사찰 83개를 담았으니 이제 ‘절 그림’은 매조지가 된 걸까. 이 화백은 “뭔 소리냐”며 눈을 부라렸다. 고창 선운사, 영천 은혜사, 강화 전등사, 해남 대흥사…. 아직 연이 닿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단다. 평생 길을 벗 삼아 발품을 팔았는데, 그 팔자가 어디 가겠냐며 껄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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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