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원 논설위원
박 당선인의 국가안보실 부활 선언은 이명박(MB) 정부가 구축한 기존 시스템의 부정으로 들린다.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거중조정과 중장기 전략 수립, 위기 대응이라는 세 가지 핵심영역이 모두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당시처럼 군 최고통수권자가 사건 발생 후 1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보고를 받는 사태는 없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10분 안에 판문점 이북에 집중 배치된 북한의 장사정포 수천 발이 서울의 하늘에 쏟아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수술이 불가피하다.
한 캠프 인사는 “MB 정부 들어 외교안보 시스템이 더 나빠졌다는 것은 99%의 전문가가 동의한다. 현 정부 인사들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독점했다는 말을 듣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NSC 사무처를 공중분해해 위기대응 기능을 소방방재본부, 행정안전부, 국방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분산시킨 것이 총괄조정 기능 수행 마비로 귀결됐다는 판단이다. 차관급으로 외교안보통일 문제를 사실상 주도했던 이종석 NSC 사무차장의 선례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MB 정권이었지만 5년이 지난 시점에서 ‘모든 길이 김태효로 통했다’는 야권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명성에 비해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의 헨리 키신저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 옛 소련과의 군축(軍縮), 중국과의 수교, 베트남전쟁 종전 협상 등에 직접 참여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월권을 했다는 지적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보좌한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은 이라크 침공이라는 그릇된 판단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대통령을 충직하게 보좌하는 것이 안보보좌관의 1차 임무지만 대통령이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직언(直言)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인들이 가장 훌륭한 안보보좌관으로 기억하는 인물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다. ‘선의의 조정자(honest broker)’ 역할을 자임하며 대통령의 철학과 비전을 각 부처의 전문성에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두 차례(제럴드 포드,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지냈던 그는 정당과 이념을 초월해 민주, 공화 양 진영 외교안보 담당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멘토’로 자리매김했다.
새 정부 국가안보실에 오랜 ‘오리엔테이션’ 기간이 주어질 것 같지 않다. 원자력협정 개정,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 한미 동맹 현안이 산적해 있고 3차 핵실험 준비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북한도 예고 없이 도발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까지 55일 남았다.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