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 원인보다 피해정도 따라 양쪽 처벌… 사법관행의 불편한 진실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사는 이모 씨(42)는 아파트 내 자신의 지정주차구역에 다른 차가 주차돼 있어 다른 곳에 잠시 차를 댔다가 봉변을 당했다. 해당 구역 주인이라는 B 씨가 이 씨를 불러대더니 친구와 합세해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휘두른 것. 이 씨는 얼굴과 가슴을 10대가량 두들겨 맞다가 화를 참을 수 없어 B 씨의 뺨을 한 대 때렸다. 이 씨의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이 이 씨까지 입건하려 해 ‘울며 겨자 먹기’로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 15일 새벽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한 술집에서 특수부대 소속 한모 중사(22) 일행 4명은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에 있던 후배 부사관들과 시비가 붙었다. 소란이 일자 술집 종업원들이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한 중사 일행과 종업원 10여 명이 난투극을 벌였다. 경찰은 특수부대원들은 헌병대에 넘기고 업주 김 씨는 18일 구속했다.
경찰은 양측이 폭력을 쓴 사건을 ‘쌍방 폭력’ 또는 ‘쌍방 피해’로 처벌하고 있다. 한쪽이 먼저 시비를 걸거나 주먹을 휘둘러 싸움의 원인을 제공했더라도 양측을 모두 형사입건한다. 처벌은 대개 누가 원인 제공을 했느냐보다는 결국 신체적, 물리적으로 누가 더 큰 피해를 입었느냐에 따라 가중치가 결정된다. 이 때문에 방어권 차원에서 대응했다가 가해자로 몰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방어행위는 규제해야 하지만 현행 정당방위의 성립 요건이 너무 까다로워 상습 폭력범에게 악용될 소지가 크다고 지적한다.
정한중 한국외국어대 로스쿨 교수는 “조직폭력배 등 폭력사건을 잘 아는 ‘선수’들은 먼저 시비를 걸거나 때려놓고도 잘 아는 병원에서 장기간의 진단 일수를 받아와 오히려 합의금을 뜯어가는 경우도 있다”며 “배심원제 등을 적극 활용해서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편의주의에 안주하는 수사당국
경찰은 선의의 피해자가 나올 수 있는 점을 고려해 지난해 3월 ‘쌍방폭력 정당방위 처리 지침’을 내렸다. 폭력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려 정당방위로 인정되면 쌍방폭행을 적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결과 올해 1분기 정당방위로 인정돼 불입건 또는 불기소 처리된 폭력사건은 9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7건에 비해 5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경찰과 사법당국이 ‘수사 편의주의’에 빠져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양측 주장이 다르면 수사력을 투입해 잘잘못을 따져야 하지만 인력이 부족하고 절차가 번거롭다는 이유로 조사 자체를 꺼린다는 것.
나국주 법무법인 일조 대표변호사는 “간단한 폭행사건에서 한쪽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수사력을 동원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수사기관의 문제도 많다”며 “현재처럼 양쪽 다 가해자라는 식으로 처리하면 전과자를 양산하는 부작용이 커 상식에 맞게 정당방위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태웅 기자 pib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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