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화성 전문기자의&joy]해 저무는 부여를 걷다

입력 | 2012-12-28 03:00:00

임진년 해 넘어간다… 미륵이 두손 모아 보낸다




잘 가라! 2012년 용의 해! 해거름 녘의 충남 부여 성흥산 산마루의 400년생 느티나무. 겨울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반공중에 걸려 있다. 뼈만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로 뿌옇고 멀건 해가 걸렸다. 느티나무는 언 살이 터지고 잔가지가 찢겨 나가도 꿋꿋하게 묵언정진 중이다. 그렇다. ‘살아가노라면/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그걸 사는 거다//봄, 여름, 가을, 긴 겨울을/높은 곳으로/보다 높은 곳으로, 쉬임없이/한결같이//사노라면/가슴 상하는 일 한두 가지겠는가’(조병화 ‘나무의 철학’). 느티나무 발아래엔 부여, 논산 일대의 낮은 산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겨울 금강이 구불구불 느릿느릿 ‘깊고 나직하게’ 흐른다.부여 성흥산=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신동엽·1930∼1969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겨울나무는 뼈만 남아 반공중에 걸려 있다. 충남 부여 성흥산(268m) 늙은 느티나무는 산마루에 홀로 묵묵히 서 있다. 칼바람이 분다. 언 살이 터진다. 산 아래 금강이 시린 어깨를 감싸 안고 잔뜩 웅크리고 있다. 저 멀리 부여, 논산 일대의 낮은 산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성흥산은 ‘백제의 목젖’이다. 부여의 서해 바닷길을 지키는 요충지이다. 높진 않지만 벌판에 평지돌출로 우뚝 솟았다. 백제 수도의 관문인 금강 하구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다. 그 산마루엔 400년 넘은 느티나무가 암소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만고풍상을 겪으며 묵언정진 중이다. TV드라마 ‘서동요’의 촬영 장소로도 이름났다. 느티나무는 해보다 먼저 눈을 뜨고, 해보다 늦게 눈을 감는다. 동산의 붉은 해를 가장 먼저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서해 바다로 잠기는 홍시 같은 해를 두 손 모아 고이 보낸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주름살투성이 얼굴과/상처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저곳을 보라/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년’(김남주 ‘고목’에서)

성흥산은 사비성의 외곽 방어진지였다.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침입자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다. 501년 웅진백제시대 동성왕(재위 479∼501년)은 이곳에 가림산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加)에게 성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백가는 이에 불만을 품고 사냥 나온 동성왕을 죽였다.

동성왕의 이복형 무령왕(501∼523년)은 백가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523∼554년)은 서둘러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겼다. 성왕은 금강과 서해 바닷길을 통해 중국, 왜 등과 국제교역을 확대함으로써 백제 중흥을 꿈꿨다. 사비성 코앞에 있는 가림성이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림성 둘레는 1.5km, 성벽 높이는 3∼4m. 걷는 데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우물 3곳, 군창 터, 남문 터가 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거북등껍질 소나무(수령 350년)가 불상 머리 위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성흥산 남쪽 기슭에는 대조사(大鳥寺)라는 절집이 있다.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18m)과 비슷한 돌미륵불상이 눈길을 끈다. 키가 10m가 넘는다. 투박하지만 은근한 매력이 있다. 연꽃을 쥐고 있는 두 손 모양으로 미루어 관음보살상이 틀림없다. ‘황금새가 이곳 바위에 앉았고, 곧이어 빛과 함께 관음보살상이 나타났다’는 창건 설화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곳 사람들은 미륵불상이라고 불렀고, 문화재청도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으로 표기했다. 민중은 ‘메시아 부처’인 미륵불이 내려와 이 고단하고 힘든 사바세계를 구제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돌미륵 머리 위를 양산처럼 감싸고 있는 용비늘 소나무가 이채롭다. 수령 350년의 늙은 소나무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려, 꿈틀꿈틀 용틀임하듯이 몸을 비틀며 억센 모습으로 서 있다.

부여는 해거름에 가야 제 맛이다. 사비도성의 한복판에 있었던 옛 정림사 절터와 그 정림사 터 한가운데에 훤칠하게 서 있는 오층석탑이 그렇다. 오층석탑은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약간 오른쪽으로, 그것도 석양빛에 비껴봐야 몸매가 더 잘 드러난다. 참나무 같은 탄탄한 돌 근육이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그것처럼 소박하면서도 우아하다. 단순하면서도 헌걸차다. 높이가 8.33m로 당당하다. 멀리서 점점 가까이, 가까이서 점점 멀리 보거나, 혹은 사방에서 탑돌이 하듯이 찬찬히 살펴보는 게 좋다. 보면 볼수록 매력만점이다.

 

부여는 봄 여름 가을보다 겨울이 고즈넉하다. 온 동네가 텅 비어있다. 빈 들 같다. 산은 낮고 들판은 넉넉하다. 사람들도 느릿느릿 여유롭다. 평일에도 한적한 휴일처럼 느긋하다. 그래서 다녀오면 가슴이 꽉 찬다.

겨울 금강은 웅숭깊다. 구불구불 흐르는 듯 마는 듯 깊고 그윽하다. 부소산(扶蘇山·106m)은 백제 왕궁의 뒷동산이다. 뒤뜰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시 땐 왕궁과 사비도성을 방어하는 수도사령부 같은 곳이다. 실제 백제 멸망 때 최후 방어진지였다. 군창 터가 그 좋은 예다. ‘부소’는 백제말로 ‘솔뫼’, 곧 ‘소나무산’이란 뜻한다. 지금도 소나무가 많다.

어슬렁어슬렁 걸어도 1시간 정도면 대충 둘러볼 수 있다. 야트막하지만 낙화암 절벽 같은 가파른 곳도 있다. 백마강은 부소산을 안고 휘돌아간다. 백마강은 금강의 일부다. 부여 규암면 호암리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의 16km를 따로 떼어 그렇게 불렀다. ‘백제의 큰 강’이란 의미다.

부소산성은 오후 느지막이 해 질 때가 안성맞춤이다. 길이는 2.5km 정도. 막내 손잡고 산보하기 딱 좋다. 산 아래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저녁연기를 피워 올린다. 백제는 사비성에서 122년(538∼660년) 동안 문화를 꽃피웠다. 의자왕을 비롯한 6명의 왕이 거쳐 갔고, 5만 명의 백제 주민이 살았다. 부소산에는 백제의 충신 성충, 흥수, 계백 장군을 기리는 삼충사가 있다.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진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의 바위절벽(30여 m)이다. 그 절벽 위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다.

신동엽 시인은 부여 사람이다. 그를 키운 건 팔 할이 ‘비단가람’ 금강이다. 그는 민족시인이기 이전에 결 고운 서정시인이었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화사한 그의 꽃/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라고 노래했다.

신 시인의 소박한 집은 부여군청 부근에 남아있다. 시인의 아내 인병선 씨(짚풀생활사박물관장)가 남편을 위해 지은 ‘생가(生家)’라는 시가 그 집에 걸려 있다. 애틋하고 저릿하다. ‘있었던 일을/늘 있는 일로/하고 싶은 마음이/당신과 내가/처음 맺어진/이 자리를/새삼 꾸미는 뜻이라/우리는/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언제까지나/살며 있는 것이다.’
▼ 겨울되면 극락전-오층석탑-석등이 앵글안으로 쏘옥∼

● 김시습이 눈을 감았던 부여 무량사

천왕문에서 바라본 무량사 안마당. 석등-오층석탑-극락전이 남북 일직선상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부여 무량사(無量寺)는 아늑하다. 어머니 품처럼 편안하다. 절집은 천왕문 사각형 테두리 안에 가득 차 있다. 액자 틀에 들어있는 가족사진처럼, ‘석등-오층석탑-극락전’이 남북 일직선상 한 줄로 서 있다. 여름엔 오른쪽 늙은 느티나무와 소나무 가지가 ‘極樂殿(극락전)’ 현판 글씨를 깻잎머리처럼 살짝 가린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에야 ‘극락전-오층석탑-석등’의 단아한 모습을 오롯하게 볼 수 있다. 동승(석등)과 주지 스님(오층석탑), 그리고 곱게 늙은 조실 스님(극락전)이 공손하게 합장하고 있는 것 같다. 삼대(三代)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눈 쌓인 달밤, 푸른 기운 감도는 무량사는 황홀하다. 둥근 보름달이 만수산(575m) 잔등 위를 지나 극락전 어깨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 평평한 절집 마당에 쏟아지는 눈부신 달빛 부스러기. 셀 수 없는 무량의 도를 닦는 곳. 극락전은 외관은 2층이지만 안쪽은 위아래가 천장까지 확 트여 있는 통층이다. 인자한 장자풍의 절집. 넉넉하면서도 덕스럽다.

무량사는 곳곳에 김시습(1435∼1493)의 흔적이 배어있다. 그가 말년에 이곳에 묵으며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우선 ‘極樂殿’ 편액을 그가 쓴 것으로 전해진다. “가진 게 없으니 글씨로나마 시주하겠다”며 써줬다는 것. 극락전 옆 영정각엔 김시습 초상(보물 제1497호·사진본)이 있다. 기록에 그는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한다.

부도밭엔 ‘五歲金時習之墓(5세김시습지묘)’라고 쓰인 묘비의 부도가 있다. ‘5세’란 ‘다섯 살 신동’을 뜻한다.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세종 앞에서 그 재주를 뽐낸 데서 유래했다. 극락전 뒤편의 산신각이 김시습이 머물던 토굴이 있던 자리다. 산신각 옆 ‘淸閒堂(청한당)’ 편액의 ‘閒(한)’ 자는 글자를 옆으로 눕혀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극락전 옆 우화궁(雨花宮)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 ‘꽃비가 내리는 궁전’이라는 뜻이 아름답다.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이 비 오듯이 내렸다는 일화에서 따온 것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