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훼방놓는 詩를 쓰고 싶다, 이상한가?”
‘기자가 등단하면 이름을 바꿔야 하냐’고 같은 이름을 쓰는 황인찬 시인에게 물었더니 그는 “그러는 게 좋겠다”고 답했다. “이름이 같으면 청탁 전화가 잘못 가는 등 혼란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불편한 심기는 일상으로도 파고들었다. 간단히 전화번호만 교환한 한 젊은 여성 시인이 “야, 너 동아일보 기자였냐”고 뜬금없이 카톡(카카오톡) 메시지를 날리는가 하면, 한 출판사 대표는 대뜸 “연애는 잘돼 가냐”고 메시지를 보냈다.(기자는 유부남이다;;;)
언제부턴가 만나는 시인들은 “황인찬 시인을 알고 있냐. 만나봤냐”는 말을 인사말처럼 건넸다. 궁금했지만 참았다. 무엇보다 별 용건도 없이 “제가 황인찬 기자인데요…”라며 먼저 전화를 걸기가 어색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황인찬 시인(24)이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민음사·사진)를 펴내고, 이 시집으로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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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카페에서 동명이인이 마주앉았다. 시인은 말했다. “언젠가 (시인) 최문자 선생님께서 전화를 걸어서 ‘언제쯤 뵐까요’ 하시기에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전화를 끊었죠. 지금도 ‘기자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시는 분이 많아요.” 동질감이 느껴졌다. 둘은 본관(장수)과 ‘인’자 돌림인 항렬도 같았다.
기자=첫 시집을 내기 전부터 문단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데….
시인=등단(2010년 현대문한 추천) 이후 좋게 봐주셔서, 문예지 이곳저곳에 글을 실었어요. 이번 시집의 시도 대부분 문예지에 실렸던 것들입니다. 운이 좋은 것 같아요.
기자=신인이라 지면 얻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좋은 평을 받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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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예? 왜요?
시인=많이 봐 주시고 월평도 실리고 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빨리 받아들여지는, 읽히는 시를 썼구나’란 생각도 들었어요. 시대를 반 발짝 앞서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게 못한 거죠.
황인찬 시인의 시에는 20대 초반 청년의 시답지 않게 깊은 사유와 성찰이 담겼다. 대표시로 꼽히는 ‘구관조 씻기기’에서는 새와 인간의 정신이 합일되는 듯한 세계를 보여주고,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서는 고즈넉한 방 안에 있는 백자의 깊은 정신세계를 엿본다. 시집의 해설을 쓴 박상수 시인은 “인간의 옷을 입은 채로 이 속세를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수도사이자 마법사이며 백색의 기사(騎士)다”라고 평했다.
시인=아휴∼ 해설을 받아보고 나서 놀림감이 생겼다 싶었어요. (영화 ‘반지의 제왕’의) 마법사 간달프가 생각나잖아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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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어떤 시를 쓰고 싶어요?
시인=말이 좀 이상할 수도 있는데, 생각을 저해한다고나 할까. 생각을 저해하고 방해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요.
황인찬 시인은 생애 첫 인터뷰를 같은 이름을 가진 기자와 했다며 즐거워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