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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인터뷰]음치 최백호, 1973년 어느날 갑자기 무대 휩쓸다

입력 | 2012-12-15 03:00:00

○ 내 인생을 바꾼 순간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추석을 맞아 외가 식구들이 모인 자리. “노래 한 곡 하라”는 친척들의 계속되는 권유에 난감해하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중학생 최백호(62·가수·사진)가 나섰다. “제가 할게요.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 중 누군가가 말했다. “야야. 그만둬라. 그만해.” 학교에서라고 다를 건 없었다. 중학교 음악 시간, 합창을 하면 최백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친구들 소리 사이에서 툭툭 불거져 나왔다. 독창을 할 때는 아예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듣다 못한 음악 교사가 말했다. “너 왜 음악실에 들어와 있냐. 미술실 가서 그림이나 그려라.” 그 길로 미술실로 쫓겨났다. 홀로 미술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생각했다. “나는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되는 사람이구나.”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쫓겨나게 만드는 노래가 싫었다. 음악이 두려웠다.

1973년, 그런 최백호가 무대에 섰다. ‘틴클럽’, 부산 번화가인 서면의 통기타 라이브 클럽이었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 서울에서 내려온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오르던, 부산에서 손꼽히던 라이브 무대였다. 그곳에서 최백호는 통기타를 연주하며 송창식 윤형주가 결성한 그룹 ‘트윈폴리오’의 노래와 중견가수 최희준의 노래 등을 불렀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로 퍼졌다. 노래가 끝났다. 사람들은 웃지 않았고 노래를 중간에 끊지도 않았다. 박수가 쏟아졌다. 그의 노래를 들으려는 사람들은 그가 그곳에서 일한 1년 반 동안 눈에 띄게 늘어났다. 한때 조숙하고 거칠어 웃음거리가 됐던 독특한 목소리는 20대가 된 최백호와 점점 더 잘 어울렸다. “나도 누군가가 좋아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구나.” ‘당분간 노래를 계속하며 살지도 모르겠다’는 희미한 느낌이 박수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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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최백호의 삶을 바꾼 순간

가수 생활 30여 년 동안 최백호는 노래 부르는 일의 즐거움을 몰랐다. 자신에게 맞는 노래를 혼자 만들어 혼자 부르는 동안 비루함이 쌓여갔다. 그런 최백호가 지금 완전히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다. 여러 뮤지션과 함께 작업한 새 앨범을 낸 그는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행복하다”고 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유일한 재산
누구나 빨리 병을 고친 뒤 병원에서 퇴원하고 싶어 하지만 최백호는 달랐다. 1971년 12월, 결핵을 앓고 있던 그에게 마산국군통합병원은 평생 있고 싶은 곳이었다. 그해 1월 입대한 그는 여름에 결핵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 입원한 지 5개월이 지나자 의가사 제대를 할 날이 다가와 있었다. 불안했다. 병원을 나서는 순간 암흑일 게 뻔했다.

그에게는 아픈 아들을 맞아줄 부모가 없었다.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최원봉)는 1950년 11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당선 일주일 만에 아들(최백호)까지 태어나 겹경사가 났다며 기뻐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입대하기 3개월 전인 1970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경남북의 학교를 돌며 교편을 잡던 어머니는 당시 교사가 받던 박봉으로는 도저히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없다며 부산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재수를 하던 최백호와 어머니는 조그마한 잡화점에 딸린 방에서 둘이 살았다. 가게를 열어 적은 돈이나마 벌어 볼 희망에 부푼 것도 잠시, 어머니는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세 들어 살던 가게는 이내 처분됐다. 어머니도, 아픈 몸을 누일 단칸방도 사라졌다. 학업과 직장 때문에 흩어져 살고 있던 누나 둘에게 의지할 수도 없었다.

1971년 12월 31일, 마지막 지푸라기 같았던 병원은 “나가라”고 했다. 최백호는 결핵 환자 보상금 11만5000원을 손에 쥔 채 마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누군가의 돌봄이 절실했던 환자의 눈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그저 암담하고 외로웠다.

고향이던 경남 동래군으로 돌아가 일광해수욕장 인근의 가장 싼 방을 구해 혼자 요양했다. 그는 그때의 삶을 “너무 너무, 굉장히 힘들었다”라고 표현했다. 가진 거라곤 결핵이 걸린 몸과 보상금을 쪼개 산 중고 통기타 하나가 전부였다. 월세를 낼 돈이 떨어져 산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을 때도, 산을 떠나 울산의 친구 집을 전전할 때도 기타를 놓지 않았다. 외로운 공간에서 기타를 치며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면 조금이나마 힘이 생겼다.

고교 시절 저녁 무렵 일광해수욕장에 나와 보면 동네 형들이 소나무 숲에 둘러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온갖 노래들이 기타 선율과 함께 밤바다로 쏟아졌다. 그 소리에 매혹돼 기타를 빌려 독학으로, 감으로 배운 최백호에게 기타 연주는 큰 위안이었다. 스스로를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라 치부해 노래하는 걸 두려워했던 그도 기타를 칠 때만은 그 소리 위에 약간의 흥얼거림을 얹을 수가 있었다. 그는 “2년간 이어진 지독하게도 힘들었던 시간은 어쩌면 내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습작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준 기회였는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음치의 진가
“우리 매형이 부산 서면에 통기타 라이브 클럽을 하나 여는데 통기타 치면서 노래할 가수가 많이 필요하단다. 내랑 같이 가수 구하러 댕기게 부산으로 온나.” 1973년 12월 친한 친구의 전화를 받고 울산에서 부산 서면으로 간 최백호는 웬일인지 이제 막 문을 연 라이브 클럽 ‘나들이’의 가수가 돼 무대에 올라 있었다. 가수를 스카우트하려고 부산 시내 라이브 클럽을 돌며 가수들을 구경하던 그는 생각했다. ‘저 정도면 내가 해도 되겠다.’

한때 ‘명성’을 날리던 음치의 첫 무대가 있었던 그날, 손님은 없었다. 종업원 5명만이 매장 안을 왔다 갔다 했다. 30분 동안 그는 기타를 치며 온갖 노래를 불렀다. 종업원들은 박수를 쳤다. 사장은 “노래를 계속 해봐”라고 했다. 태어나 처음 듣는 박수였고 우회적이지만 분명한 칭찬이었다. 첫 무대에 선 지 일주일 만에 ‘틴클럽’에 스카우트돼 그 목소리의 진가를 알아보는 팬들을 불러 모았다. 이듬해인 1974년에는 서라벌레코드사 소속 가수가 됐다. 웃음거리였던 음치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하듯 편안하게 노래하는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며 비약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노래를 못하는 게 아니라 흔치 않은 음색을 가졌던 것이었다.

“사는 게 절망적이었는데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순간 돈이 생기더라고요. 노래를 하면서 ‘좋다’, ‘즐겁다’ 하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이거 하면 돈 나오고 배도 안 고프다’ 그 생각이었죠.”

돈을 벌기 위해 노래하던 그의 인생은 1977년 1월 서울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집 음반을 낸 지 일주일 뒤. 대형 레코드사에 소속돼 있으면서도 여전히 명동 라이브 카페를 전전하며 돈을 벌던 무명가수 최백호의 귀에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걷던 너무도 익숙한 길, 명동의 거리에서였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노래는 끝나는가 싶더니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수십 번 반복되며 음반 가게 스피커를 타고 명동 거리 곳곳으로 퍼지고 있었다. “이 노래를 정말 좋아해서 테이프 앞뒤로 빽빽하게 녹음한 다음에 하루 종일 틀고 있어요. 온종일 이 노래만 들어요.” 음반 가게 주인은 최백호를 알아보지 못하고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그 노래는 8만 장 넘게 팔렸던 최백호 1집의 타이틀 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였다.

노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슬픔에 빠져 있던 최백호가 노트에 슬픔과 외로움을 쏟아내듯 써내려간 글귀에 작곡가 최종혁이 멜로디를 붙인 것이었다. 최백호의 어머니는 10월, 가을에 떠났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슬픔을 여실히 담아 낸 가사를 선물하고 떠난 건지도 몰랐다. 최백호는 멜로디가 붙여진 처연한 노래를 들으며, 그 노래가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광경을 보며 한동안 정지된 것처럼 서있었다. 가수를 딴따라라며 비하하던 1970년대. “나는 돈을 벌려고 노래를 시작했고 언젠가 노래를 그만둘 것이다. 28세에 국회의원이 된 아버지처럼, 누구나 멋진 사람이었다고 칭찬하는 내 아버지처럼 멋진 사람이 돼야만 한다. 절대 가수가 직업이 돼서는 안 된다”라며 스스로를 강박하던 최백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가수가 내 평생 직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말하는 듯 편안하고 과하게 꾸미지 않으면서도 쓸쓸함을 담은 목소리’의 주인공, 최백호의 가수 인생이 1977년 추운 겨울, 명동 한복판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1978년 발매된 2집 앨범 자켓 속의 젋은 최백호(위)와 올해 발매된 최백호의 19집 앨범 ‘다시 길 위에서’(아래)

다시 길 위에서
최백호는 최근 나온 19집 앨범 ‘다시 길 위에서’가 발매되기 전 18집까지, 총 100여 곡의 노래를 발표했다. 그는 “그중 2, 3곡을 빼놓고는 다 내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이다. 잦은 전학과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을 달래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무 위에 올라가 습작하던 습관이 내가 스스로 노래를 만들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 같다”라고 했다.

그런 그가 이번 앨범에서는 단 한 곡도 직접 쓰지 않았다. 앨범에 든 11곡 중 데뷔앨범에 수록됐던 곡을 리메이크한 ‘뛰어’를 빼고는 대부분 이주엽 씨가 작사한 곡이다. 작곡도 말로, 김종익, 박주원 씨 등이 맡았다. 스스로 만든 곡을 고집하던 그의 마음은 왜 36년 만에 바뀌었을까.

“그동안 내가 내 식으로, 나한테 맞춰 만든 곡들을 부르다 보니까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 같아요. 갈수록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는 거였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만든 곡을 부르니까 신인가수가 된 것처럼 모든 게 새로워요. 저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가 다른 세계로 나간 느낌이에요.”

피아니스트 조윤성 씨, 기타리스트 박주원 씨, 재즈 보컬 말로 등과 함께 어우러져 앨범 작업을 하면서 그는 완전히 새로운 가수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을 느꼈다. 함께 만들어 내는 노래 한 곡이 얼마나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36년 만에 깨달았다. 그동안 몰랐던 즐거움을 속속 찾고 있다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제 목소리도 젊을 때보다 더 좋아지고 있는 게 느껴져요. 강박하던 생각들이 사라지니까 그런가 봐요. 많이 늦긴 했지만 노래의 즐거움을 제대로 알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음악을 배워 가는 지금, 행복합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