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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joy]하얀 선비들이 하얀 세상서 춤춘다… 뚜루루~ 뚜루루~

입력 | 2012-12-14 03:00:00

철원평야 철새 탐조여행




《철원평야에 눈이 내렸다. 두루미와 큰기러기들이 눈밭을 헤친다. 떨어진 낟알을 찾아 먹는다.두루미는 3∼5마리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 큰기러기는 수천수만 마리씩 떼 지어 다닌다. “뚜루루∼ 뚜루루∼” 두루미 울음소리는 우렁차고 크다. “끼룩∼ 끼룩∼” 큰기러기 떼 울음소리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수다 떠는 소리다. 귀가 따갑다. 몽골고원에 있던 독수리는 이제야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쇠 둘레’ 철원평야는 한반도의 뱃구레다. 넓고 기름진 ‘쇳골’이다. 물에도 미네랄 철분 성분이 많다. 오죽하면 철원 도피안사(到彼岸寺)의 미륵부처님까지 쇠로 만들었을까. 철원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금학산(金鶴山)도 ‘쇠 두루미’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다. 금학산 자락의 천년 넘게 목이 꺾여 있던 마애미륵불이 최근 주민들에 의해 바로 세워졌다. 막상 목을 붙여놓고 보니 얼굴이 우락부락 장군 스타일이어서 또 한번 놀랐다.

철원은 배를 채울 ‘쌀’과 무기 만들 ‘쇠’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905년 궁예(?∼918)가 철원에 미륵왕국을 건설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철원평야는 6·25전쟁으로 가운데가 동강났다. 또 그 남은 벌판마저 한탄강(140km)이 남북을 가르며 흐른다. 강은 평평한 들판을 ‘대못으로 깊게 후벼 판 듯’ 흐른다.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평강∼철원을 거쳐 연천에서 임진강과 몸을 섞는다.

월북 작가 이태준(1904∼?)이 철원에서 태어나 감수성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동치미막국수와 닭 수육을 유난히 좋아했다고 전한다. 틈틈이 고향에 내려와 낚시를 즐겼다고도 한다. 그의 문학비 뒷면엔 ‘내 고향은 철원도 아니요, 서울도 아니다. 부산 부두에 발을 올려 걷는 때부터 내 고향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의 단편 ‘고향’의 한 구절이다.

두루미는 우아하다. 군자나 선비 같다. 낟알을 주워 먹으면서도 촐랑대지 않는다. 600만 년 전 공룡과 함께 살았다. 철원평야 두루미는 흰 두루미와 재두루미가 대부분이다. 흑두루미는 어쩌다 가끔 보인다. 두루미는 몸길이가 보통 1m를 넘는다. 다리는 영덕대게처럼 가늘고 길다. 겅중겅중 휘적휘적 양반처럼 걷는다. 퍼덕거리는 큰 날개는 영락없는 선비의 휘젓는 도포자락이다. 머리를 서로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거나, 서로 가슴을 맞댈 듯 달려가다가, 빙빙 돌면서 절을 할 땐 영락없는 선비들 수인사 하는 모습이다. 발을 앞으로 반 발쯤 떼었다가, 뒤로 은근슬쩍 물러서는 몸짓은 사람들의 춤사위나 똑같다.

수놈이 바리톤으로 ‘뚜∼’ 하고 울면, 암놈들이 “뚜루∼뚜루∼” 소프라노로 맞장구친다. 흰 두루미는 크고 민감하다. 재두루미는 사람이 가까이 가도 둔감하다. 흰 두루미들은 사람 기척만 있어도 금세 날아가 버린다. 경계병의 날카로운 “뚜루∼”소리가 그 신호다. 두루미는 학(鶴)이다. 흰 학은 천년을 살면 푸른빛의 청학이 된다. 그 청학이 산다는 곳이 바로 이상향 청학동이다. 청학이 다시 천년을 살면 흑 빛의 현학(玄鶴)이 된다.

철원은 어딜 가나 궁예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철원평야 동남단엔 궁예 부하들이 슬피 울었다는 울음산(鳴聲山·923m)이 있다. 궁성 터로 정하려 했던 천황지(天皇地) 마을, 왕건에게 쫓기며 한탄했다는 군탄리…. 궁예도성은 DMZ 숲 속에 누워 있다. 외성둘레 약 1만2306m, 내성둘레 7656m. 직사각형의 왕궁은 쑥대밭에 파묻혔다. 알이 통통히 밴 지뢰밭 속에 묻혀 있다. 철원사람들은 어릴 적 어머니 자장가보다 총소리를 더 많이 듣고 자랐다.

‘철조망 지뢰밭에서는/가을꽃이 피고 있다//지천으로 흔한/지뢰를 지그시 밟고/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이름 없는 꽃//꺾으면 발밑에/뇌관이 일시에 터져/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저 꽃의 씨앗들은/어떤 지뢰 위에서/뿌리 내리고/가시철망에 찢긴 가슴으로/꽃을 피워야 하는 걸까 -정춘근 ‘지뢰꽃’에서

▼ 철새마을, 새해 첫날 새벽 5시부터 ‘새바라기 축제’ ▼

“해마다 재두루미 900∼1200마리, 흰두루미 600∼800마리쯤 옵니다. 5년 전보다 500∼600마리 더 늘었습니다. 흑두루미는 너무 귀해서 10마리 안팎, 그것도 드문드문 옵니다.”

백종한 씨(65·사진)는 철원 철새라면 모르는 게 없이 훤히 꿰뚫고 있다. 그의 집이 바로 토교저수지 아래 ‘철새 보는 집(010-4697-3145)’이기 때문이다. 1971년 이곳에 정착한 이래 40여 년 동안 철새들과 함께 살아왔다. 내로라하는 사진작가들은 으레 그의 집에서 며칠씩 묵으며 철새를 렌즈에 담는다.

“토교저수지에서는 큰기러기, 두루미, 독수리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동틀 때는 8만∼10만 마리의 큰기러기 떼가 먹이를 찾아 비상하는 게 장관이고, 두루미는 아침까지 저수지 가운데서 무리지어 잠을 잡니다. 비무장지대에서 잠을 자는 독수리는 토교저수지 둑에 뿌려준 고기를 먹으려 오전부터 하나둘 내려앉습니다.

“저수지 아래 ‘철새마을’ 양지리는 87가구 280여 명이 산다. 해마다 새해 첫날 새벽 5시부터 ‘새바라기 축제(033-452-0005)’를 펼친다. 온 동네 사람들과 외지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기러기와 두루미를 관찰한다. 서로 덕담을 나누며 떡국도 나눠 먹는다. 올해부터는 민통선이 마을 위쪽으로 올라가 외부인들 참가가 더 쉬워졌다.

“큰기러기는 부리가 넓적해서 낟알이 얼어붙으면 못 먹지만, 두루미는 눈 속까지 뒤져서 먹습니다. 그래서 눈이 오면 기러기는 사나흘씩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녹으면 다시 올라오지요. 보통 12월부터 5, 6군데에 하루 120kg씩 모이를 뿌려줍니다. 요즘 부쩍 많아진 삵이 두루미를 잡아먹어서 큰일입니다. 들고양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경원선 백마고지역, 62년만에 다시 열려 ▼


경원선 백마고지역이 지난달 62년 만에 열렸다. 서울지하철 1호선을 거쳐 동두천에서 1시간쯤 걸린다. 열차는 오전 6시 50분부터 오후 7시 50분까지 9회 왕복한다. 군인은 물론이고 나이든 어르신들의 발길이 붐빈다. 철원군청은 백마고지역에 내리는 승객들을 위해 하루 4번 안보관광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백마고지전적비를 비롯해 철원평화전망대, 월정리역, 두루미전시관, 노동당사 등을 돌아볼 수 있다.

광복 이전 철원은 한반도 교통의 중심지였다. 철원∼내금강으로 이어지는 금강산전철(1931년 개통)까지 있었다. 금강산전철(116.6km)은 24개역이 있었으며 3시간이 걸렸다. 서울 용산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2시간(101km)을 달려와 구름다리로 이어진 철원역에서 ‘금강산전철’로 갈아타야 했다. 금강산전철 노선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