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공연리뷰]‘뉴 창극’ 대중의 품에 안기다

입력 | 2012-12-04 03:00:00

사양 장르 창극에 한줄기 빛 던진 ‘장화홍련’ ★★★★☆




실험적인 창극 ‘장화홍련’은 국립창극단 배우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아버지 배무룡역을 맡은 국립창극단 최고참 단원 왕기석 씨는 “기존 창극에선 소리만 잘하면 되는데 이번 작품에선 내면 연기까지 하느라 단원들이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김미진(배장화 역), 김금미(계모 허씨 역), 김차경 씨(배홍련 역). 국립극장 제공

“눈 감으라. 외면하라. 그대 저 들끓는 검은 늪, 심연을 들여다보지 마라.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면 마침내 심연도 깨어 일어나, 그대의 영혼을 마주 들여다보리니, 그대 다시 순결할 수 없고 다시는 평온을 맛볼 수 없으리라.”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공중의 철제 다리 위에서 죽음의 사신 같은 차림의 도창(導唱·창극의 해설자)이 장화, 홍련의 아버지 배무룡(왕기석)을 향해 노래한다. 그리고 장화, 홍련 자매 실종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관객은 무대 위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강렬하고 파격적인 무대, 불안감을 일으키는 아쟁 소리. 심장을 죄어 오는 듯 긴장감도 조금씩 높아져 끝까지 이어졌다.

국립창극단이 지난달 27∼30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 ‘장화홍련’은 기존 창극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소름끼치는 어둠을 창조했다. ‘오이디푸스’ ‘레이디 맥베스’ 같은 묵직한 고전의 연출에 능한 연극연출가 한태숙 씨에게 연출을 포함한 전권을 위임한 결과다.

희곡작가 정복근 씨가 자신의 희곡 ‘배장화 배홍련’을 개작한 대본은 창극 특유의 권력자를 조롱하는 해학 대신 직설 화법으로 관객과 사회를 질타한다. 창극에선 보편적인 관객의 추임새(‘얼씨구’ ‘좋다’ 등으로 흥을 돋우는 반응)를 막기 위해 장단 악기의 사용을 억제했다. 극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국립창극단 50년 역사상 보기 드문 히트작이 탄생했다. 무대 위에 가설 객석을 만든 605석의 무대였지만 나흘 공연 중 사흘이 매진이었다. 완창 판소리를 제외하고 매진은 처음이라고 한다.

창극의 위기의식 속에서 나온 첫 작품이 지난해 독일의 유명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 씨가 연출한 ‘수궁가’다. 대본은 고전 수궁가를 그대로 살렸지만 음악을 웅장하게 바꿨고, 배우 얼굴에 가면을 씌우고, 도창에게 3m 높이의 치마를 입히는 등 무대를 거대한 설치미술처럼 연출했다. 반응은 낯설고도 새롭다는 것이었지만 일반 대중과는 괴리가 있었다.

이번 ‘장화홍련’은 창극이 현대 일반 대중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의 연령대는 20대부터 80대까지 폭넓었다. 배우들은 한복 대신 일상복을 차려입었고, 리드미컬한 판소리 창법의 대사는 전체 대사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의 창극 역시 1908년 서양식 극장으로 지어진 원각사(1914년 화재로 소실)에서 판소리와 신극을 접목해 탄생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이번 작품은 ‘뉴 창극의 탄생’이라고 할 만했다.

극은 혼인을 앞둔 배장화(김미진)와 동생 배홍련(김차경)이 실종된 지 3개월이 된 시점에서 시작해 과거를 조금씩 보여주며 실종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형식이다. 이 과정에서 악한 계모와 착한 자매라는 원작의 전형도 뒤집어진다. 친엄마의 유산을 물려받고 공부도 잘하는 자매가 강자라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계모 허씨(김금미), 세상살이에 무능한 아버지 배무룡, 철없는 막내 배장수(윤제원)는 약자다. 약자가 악에 눈 뜨는 것은 강자에게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순간이다. 특히 친아들의 패륜을 뒤늦게 알고 통탄하던 허씨가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악마적 본색을 드러내는 장면은 한태숙 씨의 전작 ‘레이디 맥베스’를 떠올리게 할 만큼 소름 끼친다.

허씨는 아들이 살해한 의붓딸들의 시신을 가방에 넣어 호수에 유기한다. 이 극이 공연되는 동안 어머니가 친아들을 살해한 뒤 가방에 넣어 저수지에 유기한 사건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창극과 현실이 묘하게 겹쳐지는 것은 그런 패륜이 자행되는 동안 이를 본척만척하는 이웃의 무관심이다. 극 중 신임 파출소장 정동호(이시웅)는 이 무관심을 이렇게 질타한다.

“실종 사건들을 다루다 보면 우리가 정말 서로한테 실존하는 존재인지 아닌지 궁금할 때가 많지요. 서로한테 관심이 없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애당초 구분할 필요가 없는 건지도 모르지요.”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