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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강남 한복판에 좀비가 떴다… 탈출할 것인가 먹힐 것인가

입력 | 2012-11-17 03:00:00

◇인플루엔자/한상운 지음/316쪽·1만2000원·톨




톨 제공

미드(미국 드라마)에도, 좀비 이야기에도 흥미가 없던 기자에게 미국 폭스TV가 만든 ‘워킹데드’는 충격이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케이블방송에서 방영하는 시즌1 재방송을 접한 뒤 연속 방영이라는 ‘덫’에 걸려 졸음을 참아가며 새벽 3시까지 시청했다. 좀비에게 둘러싸인 극한의 위기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모습은 매우 긴박하며 사실적이었다. 무엇보다 가족과 애인이 좀비로 변했을 때 눈물을 머금으며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이 뻔하면서도 매번 애절하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한국 문단에선 낯선 좀비를 다룬다. 좀비에 관한 설정은 외화와 같다. 좀비에게 공격당한 사람이 좀비로 변한다거나, 좀비의 지능지수가 낮아 우둔하게 행동한다는 점도 같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그 배경이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좀비가 창궐하고, 신사역과 논현동 사거리에서 생존자들과 좀비가 사투를 벌인다는 설정은 좀비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강남 한복판의 빌딩 숲에 위치한 고급 호텔의 옥상. 이곳엔 수도권 영공 방어를 하는 대공포 진지가 있다. 소대장과 중사, 그리고 병사 10명이 근무하는 단출한 소대. 휴가를 앞둔 이들에게 위기가 닥친다. 원인 모를 ‘좀비균’이 퍼져 호텔 밖이 좀비들의 천국으로 변한다. 애인과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이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한다.

용감한 현역 군인들을 그린 미담류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좀비+군대’ 얘기를 버무려 한층 현실적인 좀비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주인공인 일병 제훈이 사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이유는 변심한 애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이기 때문. 오직 그거다.

한상운 작가

한걸음 나아가 천신만고 끝에 애인을 찾은 제훈은 재회의 기쁨도 잠시, 바람을 피웠나 안 피웠나를 꼬치꼬치 추궁한다. ‘야 이 덜 떨어진 놈아’라며 제훈을 타박하려다가도 어느새 자신의 군 생활 시절이 떠올라 키득거리게 만드는 게 치명적 재미 요소. “좀비든 뭐든 휴가는 떠나야겠다”며 봉쇄된 문을 열거나, “지구가 멸망해도 (후임병에게) 빠따는 쳐야 한다”는 말들이 착착 감긴다. 이른바 군대에서 좀비 잡은 얘기니 여성 독자들은 멀리하는 게 좋을 듯.

어딘가 어설픈 격투 장면과 치밀하지 못한 동선 처리가 작품의 긴박감을 떨어뜨리지만 배경 설정은 탄탄하다. 좀비로 인한 혼란을 틈타 강도 사건들이 일어나 치안 당국은 좀비에다 강도까지 상대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을 봉쇄하고 국제사회와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는 설정도 설득력 있다. 핫라인으로 북한과 공조해 휴전선 인근에 배치된 병력을 후방으로 돌린다는 것도 사실적 판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거시적인 흐름들이 단순한 배경 설명 정도로 간단히 기술되는 점은 아쉽다. 스케일을 키웠으면 더 묵직한 좀비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