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로(成輅·1550∼1615)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인이 있었습니다. 창녕 성씨 명문의 후손이었지만 벼슬을 옳게 하지 못했고 집안도 넉넉지 못했습니다. 자갈밭 석전(石田)이라는 호 외에 패랭이를 쓰고 다녀 ‘평량자(平凉子)’라는 호를 썼으니 가난한 시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시 하나로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흰 이슬이 내리자 단풍은 다투어 붉은빛을 띱니다. 이렇게 좋은 날 술 한잔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강에서 잡아 올린 생선과 채마밭에서 뜯은 나물에 막걸리를 마십니다.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올랐겠지요. 곁에 있던 여인이 장난을 겁니다. 붉은 단풍잎 하나 들고 와서 노인네의 불콰한 얼굴에 대고는 웃으면서, “영감님, 얼굴빛이 이 단풍잎보다 붉네요.” 이렇게 농을 합니다. 한바탕 껄껄 웃었겠지요. 스러지면서 마지막 고운 빛을 선사하는 단풍잎에 회춘을 그리는 노인의 꿈이 어른거립니다.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