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비가 뿌려지고 나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덕에 졸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절로 마음이 상쾌하겠지요. 세사의 고민이 모두 다 사라집니다. 마침 마음을 미리 알아차린 아내가 김치에 막걸리 한 사발을 내어옵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귓가에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옵니다.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부귀영화를 누리려 아등바등하는 시대라, 이런 단출한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양반의 대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시(詩)로 한 시대를 울린 조선 중기의 시인 이달(李達) 역시 “앞마을 뒷마을에 비가 막 그치니, 집 아래 외밭은 손수 호미질하네. 깊은 골목 해가 긴데 할 일 없어서, 그늘 아래 평상 옮겨 아이놈 책을 읽힌다(村南村北雨晴初, 舍下瓜田手自鋤. 深巷日長無箇事, 樹陰移榻課兒書)”라고 했습니다. 세상사에 욕심이 없으니 할 일이 없습니다. 그저 그늘 아래 평상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그 소리를 듣습니다. 마음이 훈훈합니다.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