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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경주마의 역주

입력 | 2012-10-27 03:00:00

난 일곱 살 노장 ‘차밍걸’. 88전 88패 ‘똥말’이지요.
은퇴해도 팔려나가도 할 말 없죠. 꼴찌 인생에 희망주려는
마주님 덕분에 오늘도 달린답니다. 힘찬 응원 부탁드려요∼




1등만 기억하는 경주마 세계에서 국내 현역 최다 연패(連敗·88연패)란 이색 기록으로 주목받고 있는 차밍걸. 사람으로 치면 40대 후반인 일곱 살의 암컷 경주마다. 마주 변영남 씨(오른쪽)가 경기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차밍걸을 쓰다듬어 주고 있다. 한국마사회 제공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차밍걸’입니다. 올해 일곱 살인 암컷 경주마입니다. 제가 오늘(27일) 또 경주에 나섭니다. 89번째 출전입니다. 경주마가 레이스에 나서는 게 뭐 대단한 일이겠습니까마는 저는 좀 다릅니다. 제가 바로 국내 현역 경주마 중 최다 연패(連敗·88연패)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자랑이냐고요? 자랑 아닙니다. 세 살 때인 2008년 1월 데뷔전을 치른 뒤 직전 경주까지 88번을 뛰어 전패했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이 바닥에서는 1등이 아니면 전부 패배로 칩니다. 경마에서는 시상식도 1등한테만 열어줍니다. 그럼 2등은 해봤을까요? 못해봤습니다. 최고 성적은 3등입니다. 제 나이 일곱 살이 사람으로 치면 40대 후반입니다. 경주마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서너 살짜리 애들하고 붙어서는 이제 도저히 이기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뛸 수 있는 건 제 주인인 변영남 마주님(69) 덕분입니다. 진작 은퇴를 시키고 팔아치웠어야 할 저를 여태 돌보고 있습니다. 저는 성적이 신통치 않아 상금을 타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사료값도 안 나오는 저는 이 바닥에서 일명 ‘변마’로 불립니다. ‘똥말’이란 얘기죠. 사료값을 포함한 제 관리비가 한 달에 130만 원쯤 듭니다. 이 돈을 대는 마주님 볼 면목이 없죠. 조교사와 기수한테도 미안합니다. 돈도 안 되는 저를 맡아 훈련시키는 최영주 조교사와 1등은 애당초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등에 올라 주는 유미라 기수가 너무 고맙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습니다. 폐활량도 부족했습니다. 지금도 몸무게가 410∼430kg 정도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경주마는 대개 460∼510kg은 나갑니다. 하지만 제체중은 제가 나이 들어서도 계속 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도 비만이면 무릎에 무리가 가듯이 경주마도 무게가 많이 나가면 롱런은 어렵습니다.

마주님은 잔병치레가 적고 성실한 저를 좋아합니다. 저는 올 들어 9월까지 17번 출전했습니다. 한 달에 약 두 번꼴이죠. 경마는 체력 소모가 심해 대개 한 달에 한 번 출전합니다. 뛰고 싶다고 매번 출전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출전 신청이 몰리면 누적 상금이 많은 경주마의 출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이 때문에 누적 상금이 바닥인 저는 지난달 23일 이후 한 달 넘게 달리지 못하는 설움도 겪었습니다.

마주님은 제가 체력이 되는 한 계속 뛰게 할 생각입니다. 돈벌이는 안 되지만 1등만 대접받는 세상에서 꼴찌 인생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다고 하네요. ‘당나루’가 갖고 있는 역대 최다 출전(95회) 기록뿐 아니라 100회 출전에도 도전할 생각입니다. 역대 최다 연패(95연패) 기록도 ‘당나루’가 갖고 있습니다. 27일 오후 3시 40분 경기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제8경주(1300m)에 출전하는 ‘차밍걸’을 응원해 주세요.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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