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문화부 차장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요즘은 행정수도 이전으로 지방에서 공직에 봉사한 뒤 퇴임 후엔 서울에 옵니다’라고 답해야 했을까. 그의 말대로 조선시대엔 벼슬을 떠난 선비들이 고향에 내려가 집 짓고 ‘위기지학(爲己之學·자신을 위한 공부)’하며 지역의 문화적 버팀목으로 봉사하는 전통이 있었다. 가장 많은 집을 남긴 이가 퇴계 이황이다. 49세에 벼슬을 버린 퇴계는 귀향해 다섯 채의 집을 짓고 옮겨 다니다 61세에 마음에 꼭 맞는 집터를 찾아 도산서당을 지었다. 온돌방 하나와 마루, 부엌이 딸린 소박한 서당에 대해 김동욱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한국 건축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퇴계는 이곳에서 조선 유학의 큰 맥을 이루는 제자들을 길러내고 주옥같은 시를 지었다.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서당 뒤에 지은 도산서원은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에 따르면 ‘도산서당이라는 퇴계의 저술을 바탕으로 거기에 주를 달고, 해석하며, 발전시킨 퇴계학파의 모습’이다.
아름다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장관이나 총리직에서 퇴임한 이가 고향에 돌아가 사는 집이 화제가 된다. 건축주의 체취가 묻어나는 간소한 집이어도, 유명 건축가가 파격으로 올려 세운 집이어도 좋겠다. 그는 공직 시절의 경험담을 정리하는 틈틈이 방문객을 맞는다. 풀리지 않는 민원으로 고민하는 공무원도, 이력서를 100장씩 쓰고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지방대 졸업생도 온다. 가끔 형편이 어려운 동네 꼬마들을 모아놓고 숙제를 봐준다. 유적지에 나가 외국인 관광객에게 영어로 가이드를 해도 좋을 것이다.
상상은 이어진다. 전남 목포에 책벌레인 전직 대통령이 단골로 드나들던 책방이 있다면. 경남 거제에 전직 대통령의 조깅 코스가 남아 있다면. 대구 달성군에 북방 외교 회고록을 정리하는 전직 대통령이 있다면. 그렇다면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를 지방으로 이전하자 말자는 이야기는 나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