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레너드 케스터·사이먼 정 지음/440쪽·1만8000원·현암사
화가 에마누엘 로이체가 그린 유화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정한 새 국가의 비전 ‘연방주의’와 ‘삼권분립’은 미합중국 헌법 전편을 관통하고 있으며 사법부 최고기관으로서 연방대법원은 정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여겨져 왔다. 현암사 제공
교도소 측이 다시 장비를 설치하는 동안 젊은 변호사가 일사부재리 원칙을 들어 “사형수에게 두 번 사형집행을 하는 것은 헌법이 규정한 적법 절차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며 연방대법원에 심의를 요청했다. 대법관 9명이 내린 결과는 5 대 4, ‘죄수의 불운까지 헌법이 책임질 순 없다’는 판결이었다. 프란시스는 결국 판결이 나온 지 5개월 만에 다시 의자에 앉았고 ‘실수 없이’ 몸으로 흐른 2500V의 전류에 숨을 거뒀다.
저자는 프란시스를 여러모로 ‘두 번 죽인’ 사례 외에도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내린 역사적인 31가지 판결을 소개한다. 연방대법원에 올라오는 청원은 연간 1만 건이지만 이 중 심의를 위해 선택되는 사건은 100건도 채 되지 않는다. 추리고 추린 31가지의 목차만 훑어봐도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를 쥔 느낌이다.
1890년 처음 집행된 전기의자형은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비해 비교적 ‘인도적인’ 사형 방법으로 인식되면서 20세기 중반까지 연방 20여 개 주에서 시행됐다. 1980년 독극물 주사에 의한 처형 방식이 도입된 뒤엔 쇠퇴해 현재 앨라배마와 플로리다를 비롯한 일부 주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암사 제공
다른 법률 관련 교양 입문서들이 판례를 소개하는 데 급급했다면 이 책은 판결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잘 버무린 독특한 구성이 돋보인다. 사건의 역사적 배경과 소송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프롤로그, 판결문과 반대 의견, 판결 이후 사회에 끼친 영향을 서술한 에필로그가 미국 사회나 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는다.
책의 백미는 정갈한 판결문만큼 논리 정연한 일부 대법관의 반대 의견 글이다. 문장력과 유머, 날카로운 비판력 등 어느 면에서도 판결문에 뒤지지 않는다. 200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조지 부시와 민주당 부통령 앨 고어가 맞붙은 대통령 선거 재검표 결과에 대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양측의 구두 변론을 들은 지 16시간 만에 연방대법원이 부시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나자 반대 의견을 제시한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상황을 신속히 종료하겠다는 구실로 헌법이 보장한 동등한 보호의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대선의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도는 없어졌지만 패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패자는 재판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잃도록 만든 모든 관계자”라고 일갈했다.
판결의 시비를 따져 보는 것보다 연방대법원이 어떤 과정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 냈는지에 더 주목하는 것이 유익할 듯싶다. 추천사에 실린 글처럼 책 속 판결들이 “권위와 관행이 아닌 토론과 논증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