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철현 세종재단 이사장·전 주일대사
정부가 제네바 협약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1996년 6월에 조성해 6·25전쟁에서 전사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유해 1063구를 안장했다. 이곳에는 오늘도 애기무덤처럼 작은 봉분들이 말없이 북녘하늘을 향하고 있다.
5월 적군묘지에 묻힌 고혼들을 위로하는 100일 천도재 회향식에 참석했다. 그동안 파주 금강사의 묵개거사와 스님이 뜻을 세워 재를 올려왔다. 회향식에서 ‘해원과 화해·상생의 때가 이르렀다’는 강한 깨달음을 얻고 곧 다가올 통일시대를 깊이 생각했다.
역사는 승자가 약자에게 진정으로 손을 내밀 때 한 단계 더 발전한다. 총부리를 마주했던 당시 국가의 지도자들은 만나서 포도주잔을 부딪치고 국민들도 오가는데, 전쟁의 희생자는 고혼이 되어 떠도는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하지만 선뜻 손을 내밀자는 제의가 모험일 수도 있다. 6·25전쟁에서 피해를 본 당사자와 부모형제가 상흔을 안은 채 살아 있고,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격침 등 새로운 희생이 속출했다. 최근에는 국내 정치마저 이념 대립이 극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이 과거와 현재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시관(時觀)을 미래로’ 향해야 한다. 동족상잔의 전쟁과 교훈을 잊지 말되, 곧 다가올 통일시대를 내다보고 화해를 서둘러야 한다.
파주 적군묘지는 목숨을 뺏고 빼앗긴 적들과, 그 적들의 영혼과 화해하는 문이고 상징이 돼야 한다. 영혼이 먼저 화해함으로써 산 자들을 위한 화해의 길을 열어야 한다.
적군묘지를 양지로 끌어내고 당당하게 재단장하자. 우리가 이들을 마음으로 끌어안아 북한과 중국에서 큰 감동이 일어날 때 남북한을 잇는 마음의 가교도, 중국과의 차원 높은 교류도 가능할 것이다. 장차 통일 문제가 현안이 되거나, 동북아 정세의 구조적 전환기를 맞아 중국의 역할이 긴요해질 때 상응하는 대접도 받게 될 것이다. 김영환 고문사건을 비롯해 탈북자, 인권 등 한중 간 갈등문제도 지금과는 다른 차원에서 중국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북한 사람들뿐이겠는가. 1년에 200만 명 넘게 몰려온다는 중국인과 자주 드나드는 중국 고위인사들 역시 잘 단장된 적군묘지를 보면 북한의 중공군 묘지보다 수십 배의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이다. 세계 10위권의 국격에 맞게 감동 있는 적군묘지가 되도록 재단장하자. 죽은 자에 대한 예를 다해 고혼이 위로받고, 영혼의 화해를 통해 통일의 꽃씨로 활짝 피어나기를 기원하자. 비록 작은 일이지만 통일시대를 여는 의미 있는 포석이 되지 않겠는가.
권철현 세종재단 이사장·전 주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