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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에세이/정영신]장터에는 사람의 정(情)이 있다

입력 | 2012-08-20 03:00:00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눌까 전남 구례의 한 장터 사진이다. 장터에 팔 물건을 자전거에 싣고 가던 한 할머니가 잠시 멈춰 서서 이웃 할아버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우산 받쳐 들고…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전북 무주의 작은 마을에 장이 섰다. 보자기를 펼쳐 고추며 가지를 늘어놓고는 우산을 받쳐 들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들. 필자 제공

“아따메 징허게 덥네이, 뭔 놈의 날씨가 이런당가, 논매다가 영감이 더위 먹어 보신시켜 줄라고 닭 사러 왔네, 자네는 뭐 사러 왔능가?”

장에 나온 여인네들의 말속에서 고향을 만난다. 장 뒤쪽에서 손수 고른 닭을 손질하는 동안 아는 얼굴을 만나는 풍경이다. 이렇듯 장터풍경은 자연과 사귀는 시간이 되어간다. 장에 가면 땅이 주는 선물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번듯한 장옥(長屋·거리 양쪽에 세운 상점) 대신 장터 골목 어귀에서 농사지은 것들을 갖고 나온 여인네들은 물건을 팔 생각보다는 이웃 동네 소문에 열을 올린다. 윗마을 동산댁 영감님이 농기구에 다쳐 병원에 있다는 소식에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가 주머니 속에서 나오는 풍경은 장에서만 볼 수 있는 따듯하고 정겨운 모습이다.

또 시골마을에서 온 버스가 차부(車部·차의 집합소)에 도착하면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보따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진다. 녹두 다섯 되와 결명자 석 되를 갖고 나온 할머니는 저울눈금이 맞지 않다며 이천 원 때문에 금방 싸울 것처럼 언성이 높아진다. “아따 성님, 내가 언제 속입디여 쪼까 믿으씨요.”

한참 실랑이 끝에 서로 천 원씩 양보하기도 한다. 팔 것만 있으면 좌판을 차려놓고 질펀하게 앉아, 속고쟁이 쌈지 주머니 속에서 나온 찢어진 천 원짜리에 밥풀이 붙어있어도 채근하지 않는다. 두세 시간 걸려 펼쳐놓은 좌판에서 개시도 못한 사내가 안주 없는 강소주를 병째 나발 불어도 탓하지 않는 곳이 장터다.

난전을 펼쳐놓고 장구경을 다녀도 주인 없는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을 때 빗자루 몇 개 둘러메고 장터 안을 돌아다니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국밥집으로 들어가 할아버지가 장사를 끝내도 되는 곳이 장터다. 리어카와 됫박을 45년 동안 사용하고 있는 할머니는 금이 간 됫박을 옥양목으로 감아 줄 때마다 함께 늙어가는 친구 같다고 한다. 덤과 정이 묻어있는 됫박의 소리와 색깔을 살아있는 시간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장터인 것이다.

순박한 여인네들의 얼굴에서는 경쟁이 없어 좋다. 그러나 해가 바뀔 때마다 소중한 것들이 소멸되어 가는 것은 안타깝다. 장터 골목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렸을 적 기억이 일제히 일어나 나를 향해 걸어온다.

약장사와 엿장수 좌판은 아이들 놀이터로, 처음으로 보는 원숭이며, 엿장수 가위질 소리에 맞추어 고무줄놀이까지 했었다. 한쪽에서는 새끼 돼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던 삼식이, 털이 숭숭 달린 복숭아를 광주리에 담아온 순덕이네, 주근깨투성이인 깨순이가 이고 온, 소금물에 우린 감을 베어 먹던 얼굴은 저장해둔 시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시간으로 다가온다. 어렸을 적 장날은 축제날이었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에 짚으로 깨끗이 닦아 토방 위에 올려놓은 하얀 고무신을 신고 동구 밖을 나서는 동네 어르신들 뒤로 아이들도 하나둘 따라가곤 했었다.

정영신 소설가 겸 사진작가

그런데 요즘 장터에 가보면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장터에 가면 생활과 문화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장터에 나와 자연과 흙과 나무에서 흘러나온 푸르디푸른 사람살이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중심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장터이고, 장터로 통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물결은 장터에서 잠시 멈춘다. 돈보다 귀한 사람의 정(情)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함께 사람 사는 정을 만나러 장터에 가자.

※ 정 작가의 사진전 ‘정영신의 장터’는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덕원갤러리에서 열린다.

정영신 소설가 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