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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에세이/양순자]감옥 안 사형수, 감옥 밖 사형수

입력 | 2012-07-19 03:00:00


양순자 수필가

나는 30년 동안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수를 상담하면서 두 가지 금기 사항으로 괴로워했다. 첫째, 내일이 없는 그들에게 희망을 말해서는 안 된다. 둘째, 사형수들이 아파도 약을 전해서는 안 된다. 사형수들에게 약 한 봉지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형집행일이 정해졌더라도 사형수가 아프면 집행을 하지 않는다. 그걸 아는 나는 혹여 내가 건넨 약이 그들을 형장으로 끌고 가는 몹쓸 역할을 할까봐 냉정히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면서 감옥 안 사형수들과 감옥 밖 사형수인 우리들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이 집행 날이 아닐까 가슴 졸이다 떠나는 것이 감옥 안 사형수라면, 감옥 밖에서 사는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떠나는 차이가 있을 뿐. 그런데 성취감 없는 인생, 의미를 찾지 못한 인생, 후회와 불만족으로 채워진 인생을 살다 떠나면 우리도 사형수만큼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다.

어느 날 후배가 침통한 표정으로 “언니, 죽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죽고 싶은 이유를 듣고 보니 그것도 고민인가 싶은 내용이었다. “이 언니가 네 고민을 풀어주마” 하곤 후배를 차에 태워 내가 상담하던 사형수들을 묻어준 기독교묘지로 갔다. “정말 죽고 싶으면 죽어라. 내가 사형수들도 이렇게 묻어주었는데 너 하나 못 묻어주겠냐?” 그러자 후배가 기겁하면서 내 손을 잡아끌고 얼른 서울로 가자고 했다. “또다시 그런 배부른 소리 하면 안 된다. 앞으론 몇 번씩 되씹어보고 말해라.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인생의 끝을 말하더라.”

나는 2010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두 번의 수술을 했다. 그러고는 9개월간 항암치료를 했다. 세 끼 밥을 몇 번이나 먹었는지 셀 수도 있을 정도로 몸을 심하게 학대하며 살았는데 마지막까지 이렇게 독한 약을 무차별 투약하는 건 내 몸에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항암치료로 피폐해진 마음과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호수공원을 기다 걷다 뛰다 하는 것을 미친 듯이 반복했다. 결국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마지막 기운을 모아 내 삶의 천명을 실천하기로 했다.

나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배짱 좋게도 신에게 엄포를 놓으며 마지막 기도를 했다. “내 살아온 인생 한 치 후회도 미련도 없으니 지금 죽어도 원망 안합니다. 단 수술실에서 다시 산 채로 나오게 할 거면 죽는 순간까지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해주세요.” 기도는 통했다. 사형수 교화위원에 이어 ‘통장’이라는 나라의 임명장을 들고 나오면서 내 인생에서 찾은 마지막 봉사의 길이라 생각하고 교도소 봉사에 다걸기(올인)했던 그 마음으로 통장 업무에 나를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내게는 대통령 아니라 누가 불러도 거절하고 꼭 달려가야 할 통장회의가 수요일에 있다. 통장 회의를 빼면 언제 어디든 달려가는 양순자 심리상담소장으로, 에세이 ‘어른 공부‘를 막 출간한 작가로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통장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통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과 동해로 2박 3일 여행을 떠났다. 그림같이 예쁜 펜션에 짐을 풀고 있는데 ‘통장님들, 민방위훈련 수령증 갖고 가세요’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날 저녁 그 좋던 바다도 보기 싫고 그 비싼 회도 먹기 싫었다. 결국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내고 동이 틀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라가 부르니 나는 가야겠다.” 일산에 도착해서 허겁지겁 주민센터로 달려갔다. “빨리 오셨네요.” 아니, 빨리라니? 알고 보니 문자 받고 며칠 후에 가도 되는 일이었다.

내가 암에 걸렸다고 하면 애처로운 눈으로 본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암은 내 인생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대우받기를 바라며 사는 대신, 인생을 좀더 산 어른으로서 비틀거리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줄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받았다. 우리가 지키고 살아야 인생의 차선이 어떤 것인지, 삶의 소중한 가치들이 무엇인지도 되새겨볼 수 있게 해주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니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삶의 태도가 환히 보인 것이다. 내가 만난 소중한 인연들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지 찾아가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절대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 누군가가 요즘 말하는 멘토이며, 인생을 좀더 살아본 어른들이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가슴에 팍 얼굴 묻고 위로 받고 싶은 어른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누군가 나를 그토록 의지하고 믿는다고 생각해보면 70년 살아온 양순자, 나는 참 괜찮은 어른이리라.

양순자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