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엔 직장인-밤엔 힙합 뮤지션 임재현 씨의 ‘자기소개서’
임재현 씨는 질풍 같던 10대 시절에 대해 “그땐 어려서인지 두려움보다는 늘 설렘이 더 컸다”고 회고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사장님, 아시다시피 저 임재현입니다.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지만 학교에 다닌 걸로 치면 중학교 중퇴 정도가 되겠죠.
공부가 싫었습니다. 2001년 중1 때 학교를 그만둔 건 ‘교실에 앉아 있느니 세상을 부딪쳐보자’는 막연한 신념 때문이었죠. 그해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장을 땄고 이듬해 고교과정을 통과했어요. 부모님을 설득한 건 A4용지 한 장짜리 ‘임재현 10년 대계(大計)’였어요. ‘세계를 방랑하며 언어능력과 경험을 쌓고 돌아와 20대 중반에는 어엿한 직장에 들어간다’는 황금빛 플랜. 부모님은 못 이기는 척 캐나다행 비행기표 값 140만 원과 밴쿠버 한인교회 주소 하나를 쥐여주셨죠.
그 무렵 인터넷 채팅으로 ‘조시’란 친구를 알게 됐어요. ‘(뉴질랜드로) 건너오면 우리 집에 재워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2003년 1월 바다를 건넜어요. 뉴질랜드 북섬의 파머스턴노스. 조시의 집에서 그 아버님의 정원사 일을 도우며 살게 됐어요. 어느 날, 신세 지는 게 죄송해 짐 싸서 나와 택시를 탔죠. 들판을 한참 달리는데 미터기 요금이 오버됐고 제일 먼저 나타난 인가에 차를 세웠어요. 백발의 할아버지가 나오시기에 “아이 해브 노 머니. 기브 힘(운전사에게) 더 머니 플리즈”라고 했죠. 할아버지는 마구간 2층 다락에 잠자리를 내주고 목장에서 양털 깎는 일을 하게 해주셨죠. 그때 도시 뒷골목에서 흑인들이 듣던 랩에 심취했어요. 그들과 어울려 어설프게 공연도 시작했죠.
2004년 돌아온 한국에서의 삶은 팍팍했어요. 세차, 웨딩홀 접시닦이, 고철상의 재활용 분류 등등 닥치는 대로 했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혼자 컴퓨터로 음악 만들고.
스무살 때 오디션을 봐 예비 아이돌그룹에 래퍼로 들어갔지만 회사 사정으로 데뷔 꿈은 부서졌죠. 2011년 11월, (칠리뮤직) 사장님이 고맙게도 풍운아인 절 채용해주셨어요.
접었던 래퍼의 꿈은 첫 출근날 마법처럼 살아났죠. 지방 스케줄에 운전자로 나선 길, 무심결에 튼 제 데모 CD가 괜찮았던지 사장님이 말하셨죠. “너, 정체가 뭐냐. 데뷔할래?” 낮엔 회사에 충실한다는 조건으로 앨범을 내주기로 하셨고 결국 일리제이가 세상에 나오게 됐어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인터뷰 동행도 황송한데 매니저처럼 가방까지 들어주시다니요. 앞으로 잘돼서 수익을 가져다 드릴게요. 가방은 이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