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나비에게 꽃가루 듬뿍 묻히고, 자가 수정에도 유리
시계방향순으로 초롱꽃, 섬말나리, 원예종 백합, 캄파눌라.
○ 살포시 고개 숙인 금강초롱꽃
요즘 우리나라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주변에서 많은 야생화를 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 야생화는 서양의 화초와 달리 고개를 숙이고 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초여름이 되자 피기 시작한 초롱꽃과 매발톱꽃, 친척인 백목련과 달리 사람이 보기에 적당한 높이에서 아래를 향해 피는 함박꽃나무, 조금만 있으면 필 나리류가 모두 다 그렇다. 참, 할미꽃도 빼놓을 수 없다. 4월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고개를 살포시 숙이고 피었던 할미꽃은 어느덧 털이 달린 씨앗을 가득 품고 있다.
○ 꽃이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보통 식물 꽃의 생태적 특성은 주로 매개곤충에 대한 적응에서 생긴다고 본다. 고개를 숙인 꽃의 생태학적 장점은 다음의 4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① 벌 같은 매개곤충의 몸에 꽃가루가 많이 묻게 할 수 있다.
② 매개곤충이 적을 경우 암술이 자신의 꽃가루를 받아 수정(중력의 작용을 생각해 보라!)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우리 야생화는 대부분 자가 수정이 가능한 자가화합성이다).
④ 빗물로부터 꽃가루가 보호를 받는다.
우리나라의 장마철에 피는 나리류는 확실히 고개 숙인 꽃을 피우는 것이 꽃가루 보호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다. 한편, 할미꽃의 경우 미국식물학회 발표논문(중국과 미국 연구자의 자료)에 따르면 물기에 약한 꽃가루를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그런데 개화기(4월)에 건조한 우리나라 기후에서 그 설명이 맞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재미있게도 이런 고개 숙인 꽃들이 서양에서 육종되면 모두들 나보란 듯이 빳빳하게 고개를 위로 쳐든 모습이 된다. 초롱꽃과 비슷한 생김새의 캄파눌라나 서양매말톱, 서양할미꽃 같은 서양 원산의 ‘사촌’들도 그렇다. 이들은 모두 꽃의 속살인 수술과 암술을 밖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관상원예학에선 이렇게 위쪽을 향해 꽃을 피우는 품종을 선호해 왔다. 관상의 주체인 사람들에게 꽃의 모습을 좀 더 확연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에 따라 신품종을 육종할 때도 위로 피는 꽃을 선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환히 드러나는 암술과 수술이 사실은 꽃의 ‘성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면 머쓱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정남 농학박사(농림수산식품부 국립종자원) suhjn@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