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졸업생들을 찾아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저는 솔직히 그 선생님과의 해후(邂逅)가 반갑지 않았습니다. 30년 만에 만난 은사님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려도 부족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요?
저는 추억은 아름답다고 믿어왔습니다. 힘겹고 어려웠던 기억일수록 세월이 지나면 아름답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추억이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간혹 불에 덴 화상 자국처럼 가슴속에 선명하게 아픈 기억도 있지 않습니까?
교련 교사 욕설-매질에 몸서리
기억의 단면은 이렇습니다. 여드름투성이의 우리들은 입학식 다음 날부터 영문도 모른 채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각반을 차고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은 채 운동장을 돌았습니다. 플라스틱 M1소총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내색조차 못했습니다. 당시 고교에는 군대에서 막 전역한 장교들이 교련 교사로 배치됐습니다. 이들에게 학생들은 발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군기 빠진 병사였습니다. 운동장은 자유롭게 뛰노는 곳이 아니라 예비 군인을 훈련시키는 혹독한 유격장이었습니다. 동작이 틀릴 때면 욕설과 매질이 이어졌습니다. 학생회 간부였던 친구는 “교련시간에 하도 많이 굴러서 신병훈련소가 오히려 쉬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포복과 원산폭격을 통달했습니다. 체육시간이 되면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모두 축구를 해야 했습니다. 미친 듯이 공을 쫓아다니지 않으면 기합을 받아야 했으니까요.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30년 만의 해후가 반갑지 않았던 선생님의 수업시간이었습니다. 평소 권위적이었던 선생님은 남북 분단으로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강조했습니다. 선생님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권한이 더 강화돼야 하며 이런 이유 때문에 유신헌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제가 들었던 내용과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언론과 대학생이었던 사촌형들은 장기 독재의 부당성과 정권의 비호를 받는 재벌기업의 폐해를 얘기했기 때문입니다. 드러내 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미워하고 독재자라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저는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박정희 대통령이 더 오래 집권하기 위해 민주주의 전통을 깨고 만든 것이 유신헌법이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과 김영삼, 김대중 씨를 탄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기억력은 참 이상합니다. 30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선생님을 만난 순간 전광석화처럼 제 뺨을 후려갈겼던 일과 학교를 떠난 국어 선생님의 뒷모습, 그리고 견디기 어려웠던 교련시간이 생각난 것입니다.
“이제라도 용서를”친구들과 다짐
선생님이 후배들에게는 ‘인생에 있어 무엇이 소중한 가치이고 어떻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다시 만난다면 “유신헌법이 정당했고 학교가 병영화된 것이 당연했다”라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아니면 “젊은 시절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후회하실지 모릅니다.
1970년대 말 학창 시절을 보낸 저나 여드름쟁이 친구들은 가슴 깊은 곳에 시대 상황으로 인해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남아 있습니다. 친구들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제라도 그 선생님을 용서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불행했던 과거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