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회고전 ‘라비앙 로즈’
노라노 여사는 미간 주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 때문에 찌푸릴 일도 없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0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학동사거리 ‘노라노 부티끄’에서 만난 디자이너 노라노(본명 노명자·84)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심플한 블랙 재킷에 커다란 목걸이, 짧은 커트머리…. 아무리 봐도 여든을 넘겼다고 보기 어려웠다.
한국 최초의 양장패션 디자이너로 국내 첫 패션쇼를 열고 미국 뉴욕에도 진출한 노 여사는 요즘도 단골 고객을 위해 옷을 만드는 ‘현역’이다. 그는 “근육이 옷을 만드는 일에 적응했는지, 작업할 때에는 몸이 전혀 아프질 않다가 일이 끝나면 등이 쑤시곤 한다”고 말했다.
노 여사의 역할은 단골 고객들로부터 옷 기증 받기다. 그는 “할머니부터 증손녀까지 4대째 노라노 옷을 입는 고객이 옷을 기증했고, 다른 고객의 조카가 물려받은 1950년대 ‘아리랑 드레스’(한복 느낌의 드레스로 노라노의 대표작 중 하나)도 꼭 되돌려주기로 하고 빌려왔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1959년 미스 유니버스대회에서 오현주 씨가 입었던 드레스, 1967년 가수 윤복희 씨가 입은 미니 원피스(사진), 뉴욕 메이시스백화점 쇼윈도에 진열되고 미국 전역에서 팔렸던 원피스 등도 선보일 예정이다.
노 여사가 ‘노라노’로서 삶을 시작한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다. 한국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 씨의 딸로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노 여사는 경기여고에 다니던 1944년 일제의 위안부 징집을 피하기 위해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결혼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가서도 미싱을 샀다”며 “전쟁통에 옷을 살 사람이 무용수밖에 없어서 무대의상을 맘껏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