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필요한건 지식의 양 아닌 용법…앎과 삶의 일치를
이 논쟁에는 승자가 없다. 둘 다 맞고 둘 다 틀렸기 때문이다. 정기준의 예언대로 한글이 나랏말이 되면서 사대부의 나라 조선은 망했다. 이후 ‘더 많은 앎’을 향한 군중의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100여 년간의 교육은 문자의 해방과 앎의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세종 프로젝트’라고 해도 무방하다. 정기준의 예언처럼 지옥으로 가는 입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세종의 말대로 구원의 길도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은 범람하는 정보와 지식 속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건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지식의 용법이다. 지식과 삶은 어떻게 결합되는가? 앎과 삶의 일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므로 학교에선 바로 이 용법을 익혀야 한다. 윤리적 덕목으로 말하면, 우정과 연대가 그것이다. 문명의 동력은 네트워크다. 생명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네트워크란 타자와의 마주침이다. 학교란 무엇인가? 처음으로 혈연을 떠나 타자들의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곳이다. 타자를 통해 세계와 우주라는 매트릭스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곧 배움이다. 따라서 우정과 배움은 분리될 수 없다.
지식과 삶의 능동적 교감을 우리는 지혜라고 부른다. 우정이 타자와의 접속이라면 지혜는 자기에 대한 탐구다. 니체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라 말했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자기에 대한 탐구를 시도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앎이란 인식론, 존재론 같은 특정 과목의 이름이 아니다. 어떤 공부를 하든 그것이 온전히 자기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생물의 진화는 곧 내 몸의 역사이고, 천문학과 물리학은 곧 내가 사는 시공간의 이야기다. 아니, 내 몸이 곧 별이다. 오장육부는 음양오행이 펼치는 상생상극의 파노라마다. 자기에 대한 탐구가 우주적 비전으로 ‘통하는’ 것, 그것이 곧 지혜다.
앎은 공기나 물과 같다. 공기에는 경계가 없고 물은 오직 흐를 뿐이다. 앎 또한 그러하다. 앎은 순환해야 하고, 순환하지 않으면 앎이 아니다! 우정과 지혜는 그 순환의 최고 기술이다. 정기준이 지옥이라 불렀고, 세종은 구원이라고 말했던 그 ‘새로운 세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