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도 내부 충원… 9만4000명 영역 없는 ‘일괄형 업무’
세계 1위의 제조·유통 일괄형(SPA) 의류 브랜드인 스웨덴 H&M의 스톡홀름 본사 매장에서 고객들이 옷과 패션용품을 고르고 있다. 패스트패션인 SPA는 디자이너, 머천다이저, 패턴 개발, 마케터, 매장 관리 등 인력수요가 많기 때문에 고용창출 효과가 큰 분야로 알려져 있다. 스톡홀름=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스웨덴 스톡홀름 드로트닝가탄 지역에 있는 글로벌 제조·유통 일괄형(SPA)의류업체 ‘헤네스 앤드 모리츠(H&M)’의 본사. 지난달 27일 이곳에서 만난 산나 린드베리 씨(43·여)는 H&M의 글로벌 인사 총책임자다. 세계 2300개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 9만4000명의 인사 및 경력관리를 총괄한다. 그는 “H&M 직원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면 내 이력을 살펴보면 된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체육교육을 전공하고 중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하던 린드베리 씨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사표를 던졌다. 여행 비용을 마련하려고 그녀가 찾은 곳은 H&M 매장. 하지만 본사에서 나온 매니저는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보다가 “사내교육을 받아 매니저에 도전해 보라”고 권했다. 교육을 거쳐 1년 만에 매니저로 승진한 린드베리 씨는 이후 본사로 옮겨 물류, 상품기획 일을 차례로 맡았고, 영국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 H&M이 새로 진출하는 나라에 파견돼 신규매장 개설과 글로벌 마케팅을 지휘했다.
○ 인력도 ‘일괄형’으로 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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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재를 배치해야 한다. H&M은 내부 인재 육성과 인사의 유연성 측면에서 최고 수준의 시스템을 자랑한다. 본사 관리직과 디자이너, 매장 판매직이 철저히 분리된 기존 의류업체와 달리 H&M은 모든 직종이 ‘일괄형’으로 움직인다. 매장 판매직원도 사내교육을 받고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본사 디자이너도 매년 두 차례 의무적으로 매장에 나가 판매를 경험해야 한다.
스톡홀름 슬루센 지역 H&M 매장에서 만난 2년차 판매직원 스벤손 씨도 이런 꿈을 안고 3개월째 사내교육을 받고 있다.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백화점에서 일하다가 1년 만에 H&M으로 이직했다. “매장을 멋지게 꾸며 고객들을 만족시키는 것만큼 보람된 일이 없어요. 언젠가 해외에서 새 매장을 여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요. 어쩌면 한국에 갈지도 모르죠(웃음).”
사원에게 강조되는 덕목은 순발력과 근면성이다. H&M 본사 출근시간은 오전 8시. 패션업계라면 근무시간이 자유롭고 파격적인 개성을 허용할 것 같지만 1∼2주 간격으로 전 세계 매장을 관리하고 새 제품을 선보이려면 잘 짜인 규율이 생명이다. ‘생각은 자유롭게, 업무는 철저하게’, 이것이 SPA 브랜드 업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 신규채용 직원 중 여성비율 72%
연평균 11.5%씩 성장하는 기업답게 H&M은 늘 사람이 부족하다. 지난해에 H&M이 채용한 정규직만 세계 5434명에 이른다. 이 중 72%는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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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의 본사 공식 디자이너는 총 140명이지만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300여 명이다. 이 중 상당수는 학교에서 패션을 공부하지 않았다. 린드베리 씨는 “전공이나 학력은 채용기준이 아니다”라며 “전공보다 실무능력,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더 중요하게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계 H&M에서 일하는 직원 수백 명이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매년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본사로 보낸다. 본사 디자인 파트 직원 가운데 이런 방식으로 채용된 인재가 적지 않다는 것이 H&M 측의 설명이다.
스톡홀름=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 H&M 年매출 21조4363억원… 영업이익률에선 애플 앞서 ▼
제조·유통 일괄형(SPA) 의류산업은 이미 세계 패션업계의 ‘주류’가 됐다. 글로벌 1위 H&M의 2006∼2010년 연평균 영업이익률은 23.3%로 애플(21.7%)을 능가했다. 소재산업, 유통 및 물류 등 선후방효과도 기존 의류산업보다 크다. 매출 성장률이 가장 가파른 자라의 본고장 스페인에서 SPA 브랜드의 패션시장 점유율은 20%에 이른다. 일본의 경우 2010년 전 산업 평균 성장률이 ―3%로 뒷걸음질했지만 SPA 성장률은 14.7%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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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 디자인-매장관리, 학력보다 실무경험 중시 ▼
■ 국내 SPA업체 채용 기준은
고객들이 올해 2월 제일모직의 SPA 브랜드 ‘에잇세컨즈’의 명동점 개점을 기다리고 있다. 제일모직 제공
하지만 성장세를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2008년 5000억 원이던 국내 SPA 시장은 2009년 8000억 원, 2010년 1조2000억 원으로 매년 50% 이상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 전체 패션시장은 전년 대비 3.5% 커지는 데 그쳤다.
SPA 시장의 성장은 외국계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2005년 한국에 진출한 일본계 유니클로가 최대 업체로, 지난해 68개 매장에서 42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유니클로, 스페인 자라, 스웨덴 H&M 등 3개 업체의 지난해 매출액은 7150억 원으로 국내 SPA 시장의 약 40%를 차지했다.
글로벌 SPA 브랜드들이 인기몰이를 하면서 동대문 의류상들이나 개인 의류매장을 운영하던 디자이너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최근 국내 대형 패션기업들이 SPA 시장에 뛰어들면서 반전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8월 20개의 매장으로 SPA 브랜드 ‘제덴’을 출범시킨 LG패션은 올해 매장을 50개로 늘릴 예정이다. 2009년 스파오 브랜드로 SPA 시장에 뛰어든 이랜드도 연내 18개 점포를 늘려 총 50개 매장으로 규모를 키울 계획이다. 제일모직은 올해 2월 SPA 브랜드 ‘에잇세컨즈’를 내놓으면서 2020년까지 1조6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SPA로 키우겠다는 비전을 내놨다.
대형 패션기업들이 SPA 시장에 본격적으로 가세하면서 일자리 창출도 기대된다. SPA는 일반 의류와 함께 모자 양말 넥타이 신발 속옷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낸다. 계절 변화 외에도 제품의 트렌드가 바뀔 때마다 짧게는 1∼2주 안에 다수의 제품군을 교체하기 때문에 디자이너, 유통 관련 직원이 일반 패션업체보다 많이 필요하다.
실제로 올해 4개 매장을 연 에잇세컨즈는 디자이너 50명을 채용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출범한 제일모직의 다른 브랜드는 5분의 1 수준인 10명 안팎의 디자이너만 뽑았다. 에잇세컨즈는 연내 6개 매장을 추가로 개설할 계획이고, 매장당 30∼40명의 직원이 필요한 점을 감안하면 이 브랜드에서만 올해 400∼500명의 새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