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타니운스이쿄의 협곡트레킹 거의 막바지인 해발 900m 산중에서 만나는 ‘고케무스모리’라는 이름의 개울과 숲. 하늘을 가린 울창한 수풀로 주위가 어두운 데다 서로 뒤엉킨 채 자라는 나무, 개울의 돌과 바위를 온통 뒤덮은 초록 이끼로 마치 숲의 정령이 나타날 듯한 신령한 느낌을 받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히메’(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숲이다.
88m 높이에서 화강암 벽을 타고 추락하는 두 줄기의 오코폭포. 일본 100대 폭포 중 하나다. 야쿠 섬 서부 해안에 있는 세이부임도의 평화로운 모습. 원숭이와 사슴이 한가로이 봄볕을 쬐고 있다.
그래도 섬에서 비를 탓하는 이는 없다. 7200년(최대 추정치) 된 조몬스기(繩文杉)를 비롯해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재된 2000그루의 야쿠스기(屋久杉·1000년 이상 된 이 섬의 일본 삼나무 거목을 칭하는 말)’ 미야자키 하야오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각색한 애니메이션 ‘모노노케히메’(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신령스러운 숲의 계곡 ‘시라타니운스이쿄(白谷雲水峽)’ 등 이 아름다운 숲과 완벽하게 보존된 태곳적 자연이 그 엄청난 비의 소산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흘 내내 빗속에서 취재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온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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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 섬이 세상의 관심을 끈 건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다. 물론 그 대상은 야쿠스기였다. 섬은 일본 삼나무(Cryptomeria japonica)의 남방한계선으로 이 울창한 수림은 상상을 초월한 거대 강수량의 소산이다. 그중에도 삼나무―‘히노키’라는 편백나무를 포함해―특히 1000년 이상 된 노거수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큰 키다. 햇빛을 독차지하니 우점종이 될 수밖에. 둘째는 비다. 습기 많은 곳의 나무에는 나무진이 많다. 덕분에 심재가 단단해지니 병해에 강해 오래 산다. 그렇다고 이 섬 전체가 세계유산은 아니다. 1000년 이상의 남벌에도 목숨을 부지한 노거수가 집중된 고산 능선지대(섬 산지의 20%)만 등재됐다.
야쿠 섬을 찾는 이는 크게 두 부류다. 왕복 5시간의 시라타니운스이쿄와 10시간의 조몬스기 코스 트레킹에다가 섬 서부 해안의 자연유산 등재 숲길(세이부임도·西部林道)을 드라이브하는 통상의 여행자가 하나고, 산에서 야영하며 능선을 남북으로 종주(3박 4일)하는 산악 트레커가 있다. 나는 여행자 일정을 좇아 4일간 체류했다. 섬에는 산악가이드가 150명가량 활동 중이지만 한국어 가이드는 없다. 그래서 영어가 가능한 일본인을 고용했다. 산중엔 등산로 표식과 이정표가 잘 설치돼 가이드 없이 트레킹하는 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날씨가 정상적일 경우. 폭우나 짙은 안개가 끼는 등 기상이 악화될 땐 다르다. 물이 불어난 계곡을 건너다 사고를 당하거나 등산로를 벗어나 우회하다가 조난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숲 자체도 워낙 우거져 기온이 낮은 데다 날씨마저 변화무쌍해 가벼운 트레킹 코스임에도 장비만큼은 완벽하게 갖추기를 권한다. 특히 비를 막아줄 방수복과 배낭덮개, 모자, 장갑은 필수다. 가이드 중에는 아예 장화를 신고 산을 오르는 이도 있었다.
원령공주를 찾아 숲의 계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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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입의 계곡은 싱거웠다. 숲이 좀 더 우거진 것 외엔 우리 산 어디서고 만날 수 있는 작고 가파른 바위계곡이어서다. 하지만 500m쯤 가서 현수교를 건넌 뒤부터는 달랐다. 해발 750m에서 만난 ‘니다이오스기(二代大杉)’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높이 32m에 둘레가 4.4m나 되는 거대한 야쿠스기인데 고사해 썩은 삼나무(一代杉)의 갈라진 틈에 뿌리를 내렸다. 일대목과 이대목의 관계는 부모 자식과 다름없다. 죽기 전 이대목에 양분을 나눠주며 생장을 돕기 때문이다. 수명이 다해 스러지면 그걸 딛고 이대목이 생장해 일대목을 대신한다. 간혹 삼대목도 발견된다. 1000년 이상 사는 스기에서나 볼 수 있는 진기한 현상이다.
길은 걷기에 좋다. 화강암 조각이 거미줄처럼 흙 위로 노출된 뿌리 사이사이로 잘 놓여서다. 이 길은 ‘구수카와보도(楠川步道)’라고 불리는데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에도시대에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 서부) 영주는 하도 가난해 거둘 쌀이 없는 이 섬 주민들에게 삼나무를 잘라 세금 대신 바치라고 했다. 그래서 섬 남자들은 깊은 산에 들어가 거대한 야쿠스기를 베어 미야노우라 마을까지 끌고 내려와야 했는데 이 길이 그 노역로다.
야쿠 섬의 노거목은 ‘히라기’(궁궐 사찰 신사의 지붕을 잇는 널빤지)로 다듬어져 공납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쇼군 당시(1560년) 교토의 대찰 건축에 사용된 후 남벌이 금지된 메이지유신(1868년)까지 300년간 사찰과 신사, 궁궐 건축에 쓰일 목재로 끊임없이 남벌됐다. 몇 그루 남지 않은 노거수를 이제는 발품 팔아 찾아다니며 감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렇게 태어났다. 물론 발길 닿지 않는 능선과 절벽 등엔 아직도 1000년 이상 된 노거수 삼나무가 2000그루가량 남아 자연유산으로 등재돼 보호받고 있지만.
구수카와보도로 오르다 보면 이런 독특한 야쿠스기를 줄줄이 만난다. 뿌리가 세 갈래로 뻗은 산본아시스기(三本足杉), 세 그루가 창처럼 자라는 산본야리스기(三本槍杉), 둘레 3.1m에 키가 22m나 되는 야쿠스기의 뿌리가 터널을 형성한 구구리스기(くぐり杉), 윗가지가 7개로 뻗은 나나혼스기(七本杉)…. 이런 나무를 쳐다보며 쉬엄쉬엄 오르는 우거진 숲길. 그 숲의 주인은 노루와 원숭이인 듯했다. 섬에 포유류라고는 6종뿐. 해칠 것이라고는 사람뿐인데 사람도 건드리지 않으니 그 수가 각각 2만까지 늘었다. 원숭이는 무리 지어 나무 위에서 동백꽃을 따 꿀을 발라 먹느라 바빴다. 사슴은 가만히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깊은 숲으로 사라졌다. 어떤 사슴은 1m 앞에 다가가도 졸음 겨운 눈으로 햇볕을 쬐며 꼼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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